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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생각

대한민국의 미래를 예측하고 대응전략을 마련하는 미래연구원 연구진의 기고문입니다
(본 기고문은 국회미래연구원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김태경] 현재를 낯설게 하는 미래, 그리고 과거와의 대화

작성일 : 2023-09-26 작성자 : 통합 관리자



현재를 낯설게 하는 미래, 그리고 과거와의 대화


개인은 언제 미래를 생각하게 될까. 하루하루 바쁜 일상에 크게 의식하지 않던 미래라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시공간, 혹은 그 시공간에서 일어날 사건들, 사람들의 세계가 갑작스럽게 이전과는 다르게 다가오는 순간들이 있다. 그러한 순간은 대개 위기의 얼굴을 할 때가 많을 것이다.

성과를 거듭해나가는 환경에서 더 나은 대안과 혁신을 준비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위기의 국면에서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며 어디부터 잘못되었을까, 시간을 들여 반성하면서 다른 선택을 해야 했을 시점, 택할 수 있던 가능성들을 숙고하면서 미래를 대비하려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위기라는 것은 어떻게 정의되는 것인가. 단기적 관점이든 중장기 시점이든 이대로는 선호하는 미래의 경로에서 현저하게 벗어나리라는 혹은 이미 벗어나고 있다는, 진단에서 비롯될 것이다. 혹은 과거로부터 고수되는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이탈하는 전망, 현실 진단으로부터 위기를 느끼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위기라 정의하는 준거를 과거의 이상향 혹은 선호하는 규범적 미래, 어느 쪽으로 잡더라도 이를 통해 새로운 대응전략을 설계하는 개인, 집단의 의도란 현재에 있다. 행위자가 개입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공간은 현재라는 점에서, 이상적 과거의 재현이든, 규범적 미래상의 실현이든 그러한 경로에 들어가기 위한 단기적 우선순위, 장기적 전략을 디자인하고 지금, 여기에서 실행해야 한다. 미래전략은 현재를 대상으로 겨냥하는 개입으로서 현재적 맥락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동시에 현재를 분명한 일정한 시공간적 거리를 두고 접근한다는 이점을 가진다.

이렇듯 현재의 (혹은 곧 닥칠) 위기에 대한 진단을 통해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시공간에 차별화된 경로를 상정하고 이를 위한 구체적 로드맵을 구성하는 미래전략의 작업은 현재를 당연한 일상이 아니라 낯설게 만든다. 미래 혹은 과거로부터의 거리에서 현재를 낯설게 만드는 효과는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생각보다 많은 대안적 가능성, 다양하고 복합적인 정책적 갈래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든다.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미래의 가능성은 복수의 시나리오로, 그리고 다양한 개인, 집단의 차이만큼 우리‘들’이 선호하는 미래도 다양한 수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미래전략을 준비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가능미래, 선호미래에 대해 전문가들 사이에, 시민들 사이에 대화를 지속하면서, 우리는 바로 눈앞의 사태들에 눈과 귀를 빼앗기는 데서 벗어나 미래를 하나의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대안들의 열린 시공간으로 접근하고, 복수의 미래 가능성을 인지한 상태에서의 전략적 선택, 주체적 행위자로서의 개입을 할 수 있게 되며 그러한 미래와 연결되는 현재에 대한 보다 체계적이고 중장기적 접근을 할 수 있게 된다.

한반도와 관련해서도 이러한 복수의 가능성을 상기하고 준비하는 미래전략이 절박하다. 통일연구원에 따르면, 가장 최근의 남북회담은 2018년 12월 14일 체육분과회담으로, 1971년 이산가족 문제 협의를 위한 적십자회담으로 남북대화가 시작된 이래 최장기간 남북대화 단절이 지속되고 있다. 과거 최장 단절 기간은 1980년 8월부터 1984년 4월까지 약 3년 8개월로, 1983년 10월 아웅산 테러 사건 이후 6개월 안에 남북체육회담이 재개되면서 종결된 바 있다. 2019년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북미, 남북 사이에 협상 교착이 계속되는 한편, 남북 당국은 ‘주적’, ‘대적’으로 상호 규정하는 대결적 국면에서 민간의 대북 인도적 지원, 협력도 사실상 멈춰있는 상황이다.

1989년 12월 미소 정상이 지중해 몰타에서 냉전 종식을 선언한 글로벌 탈냉전의 맥락에서 1990년대 초 한반도는 ‘비대칭적 탈냉전’, 즉 한국은 지금은 해체된 소련, 중국과 수교를 체결한 반면 북한은 미국, 일본과의 수교 실패를 경험했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에도, 이 시기 남북한은 ‘해빙’의 분위기 속에서 고위급 회담을 추진했고, 그 결과 1991년 12월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서 서로를 규정하는 남북기본합의서, 조지 H.W. 부시 대통령의 미국 전술핵무기철수 선언을 바탕으로 한반도에서 핵무기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않겠다는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 서명했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에는 당국은 물론 민간 차원의 남북 경제협력, 사회문화협력, 인도적 지원, 협력이 크게 증가했다.

접촉과 교류협력, 회담과 협상의 경험은 무엇을 남겼는가. 남북 대화의 단절이 길어지면서 새로운 관계에 대한 상상이 협소해지는 지금, 중장기 미래전략을 설계하기 위해서 시공간적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과거와의 폭넓은 대화가 필요하다.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부터 고위급 회담의 연속에 이르기까지 다층위의 대화가 이어졌던 경험으로부터, 무엇이 어디서부터 어긋났는가 아쉬움과 부족함의 지점들을 분석하고 충분히 곱씹지 못했던 다양한 결의 관계의 역사를 조명할 때, 지금의 단절로부터 새로운 전망과 대안적 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크게 주목하지 않았지만 기존과 다른 미래의 경로를 밝히는 데 참조할 수 있는 경험들을 조명하고 기존의 성공 사례에 대한 철저한 오답노트를 작성해 교류협력사업을 재개할 때 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는 대안들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들이 미래만큼 다양하게 파악할 수 있는 과거‘들’과의 대화가 중요한 이유다.

이러한 과거들 중 하나로 <겨레말큰사전>남북편찬사업회의 경험을 상기한다. 2005년부터 남북한 언어학자, 문학자들이 함께 공동 편찬회의를 거듭하여 남북한은 물론 해외에 흩어진 디아스포라의 ‘지역어’을 포괄하는 겨레말을 모으는, 일종의 겨레 공통의 유산사전을 만들어왔다. 현재 남북관계 단절로 최종 단계에 오른 사전편찬을 위한 남북 공동회의가 중단된 상태이지만, 겨레말큰사전은 한반도 ‘통합어’ 사전을 위한 실험으로서 민간에서 만남을 축적하면서 변화하는 한반도 환경에서 ‘우리’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겨레말큰사전을 만들자는 남북 합의의 기원은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가 방북했을 때 김일성 주석에 시인 박용수가 쓴 ‘우리말 갈래사전’을 선물하며 겨레말 통일사전에 대한 약속을 나눈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갈래사전이란 독서를 하며 단어의 의미를 찾는 사전이 아니라 시를 쓰다가 적절한 표현을 생각하려는 길잡이로 말뭉치를 모은, 창작용 사전이다. 1989년 청각과 언어장애를 가진 시인 박용수가 순우리말 3만 6천여 개를 33개 항목 하에 분류한 우리말 갈래사전은 ‘창작’을 위한 한글 말뭉치의 모음이라는 점에서 한반도의 미래를 어떻게 써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도 특별한 영감을 준다. 미래를 위한 전략 설계가 중장기 변화하는 환경에 적확한 새로운 말, 서사,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면, 예컨대 우리는 향후 ‘민족’, ‘한반도’, ‘통일’, ‘평화’, ‘화해’, ‘공존’ 등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담는 어휘들의 사전이 필요할 것이다. 15-30년 후 한반도에서 어떻게 이러한 개념들을 의미화할 것인가는 폭넓은 과거와의 대화, 미래전망, 미래선호의 다양성에 대한 복합적인 대화를 통해 점진적으로 준비될 수 있을 것이다.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정훈

김태경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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