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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고문은 국회미래연구원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정혜윤] 일하는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 노동하는 시민조직 존중이 그 출발점

작성일 : 2022-12-27 작성자 : 통합 관리자

일하는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 노동하는 시민조직 존중이 그 출발점 글. 정혜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2022.12.27




일하는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 노동하는 시민조직 존중이 그 출발점


민주화 이후 35년이지만 노동하는 시민의 권익과 열정을 표출하는 자율적 결사체를 존중하는 문화는 자리잡지 못했다. 차이와 갈등을 조정해야할 시민의 대표가 오히려 조직노동 혐오를 부추긴다. 그에 동참하거나 묵인하는 언론과 지식인도 적지 않다. 물론 문제가 누군가의 탓만은 아니다. 우리 노동운동의 관성은 사회변화와 충돌하는 낡은 부분이 있다. 노사는 물론 노노(勞勞) 간 분쟁이 격해지면 단체행동의 목적이 전도되었나 싶게 실망스러운 일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비판과 혐오는 다르다. 아예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절멸의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는 민주주의 질서와 부합하지 않는다.

첫째, 노동조합이 민주주의를 움직이는 주요 축이라 불리는 이유는 노동자가 이타적 계급의식으로 무장한 주체여서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평범한 시민의 이기심과 불완전함, 다양한 이해관계로 인한 ‘갈등의 불가피성’을 긍정한다. 다만 욕망에 휘둘리는 개인도 이해관계에 따라 집단으로 잘 결사해 차이를 조정하면 ‘합의된 최선’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체제이다. 노동조합이 중요한 이유는 다양한 결사체 중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중요 생산자집단이고, 숫자나 잠재력에 있어 그에 견줄 세력이 없어서다. 더욱이 한국같이 결사체가 취약한 나라에서 200만 명이 넘는 일하는 시민이 대표를 선출하는 조직은 드물기에 가치가 크다.

기업에 고용된 개인은 약하지만, 집단으로 결사하면 막강한 기업 집단과 국가 관료제와 비교적 대등한 교섭이 가능하다. 때로 이기적이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노동자가 ‘조직’이란 체계를 통해 열정과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기업운영과 국가 통치기구에 참여해 불평등이 불가피한 자본주의 내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노동권 보호와 복지 확대를 꾀할 수 있었다. 이것이 지난 200년 현대 민주주의의 역사이기도 하다.
어느 나라나 기업집단의 영향력은 크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노동과 민주주의 사이의 관계를 조사한 여러 학자들이 강조하듯, 그 속에서도 노동을 배제하는 정도가 덜하고 이들의 지지를 받는 정당들도 상당한 득표를 하고 집권 전망이 있는 나라들이 계층 간 불평등 정도도 작고 복지수준도 높다.

그런데 우리처럼 노동을 축소할 생산 비용만으로 간주하고, 조직된 이들조차 참여로부터 배제하면 조합원만 아니라 사실상 사회구성원 전반을 공동체에서 제외하는 것과 유사한 부정적 효과를 낳는다. 구성원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핵심 활동을 존중하지 않고 그들의 권리 주장을 용공이나 비이성적 행위로 몰아가는 노동 억압 논리가 만연한 현실에서 일하는 시민이 존중받는 세상은 구현되기 어렵다. 근로소득보다 부동산, 주식, 비트코인 등 불로소득에 열광하고 아이들 꿈이 ‘건물주’인 작금의 현실은 ‘노동’을 배제해온 우리 민주주의 역사의 단면에 가깝다.

둘째, ‘귀족노조’라는 비난은 상대적으로 임금을 높게 받는 중산층 노동자의 등장과 확대를 노동운동의 타락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런데 대다수 노동하는 시민의 삶이 늘 가난할 이유는 없다. 노동운동의 성과가 일하는 사람의 다수를 사회중간층으로 이끈다면 그 역시 사회발전이고 진보다. 실제로 선진민주주의 국가에서 노동자는 중간계급의 중심을 차지한다.

물론 노동운동이 ‘정규직 조합주의’에 매몰됐다거나 오히려 ‘노동시장 이중구조에 기여’한다는 비판에 타당한 부분도 있다. 다만 문제의 원인보다 결과에 가깝다. 외환위기 이후 대대적 신자유주의 공세 속에 노동시장의 전면적 자유화를 막아내려 했지만 기업단위와 일부 정규직에 머무른 것은 노조의 역량 부족이었다. 그런데 지켜낸 상대적으로 나은 일자리 때문에 비정규직이 차별을 받는다. 전후관계를 뒤집어, 조직노동을 ‘기득권’으로 타자화하는 비난만으로 해결에 다가서기 어렵지 않을까.

사실 노동시장 이중구조로 인한 불평등은 이제 한국의 생산 활동 전반을 지배하는 구조적 문제로 자리잡았다. 비정규직이나 격차 문제는 지불능력이 좋은 대공장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직업 세계에 만연하다. 가령 명문사립대 정교수와 그렇지 않은 대학의 계약교수 및 시간강사 간 격차는 제조업 원하청 노동자 간 차별과 비교조차 어려운 수준이다. 대학만 아니다. 공공기관이나 지자체, 언론이나 연구기관은 물론 시민단체에도 과거 없었던 인턴이나 계약직이 넘쳐나고 직무 자체를 외주화한 경우도 상당하다. ‘너희도 같지 않냐’고 힐난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사회 지난 30~40년의 기업운영과 사회구조를 포착해 고차방정식을 풀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를 개혁의 과녁 앞에 세워 선과 악을 구분하고 공중과 적대자에게 지지하는 방식으로 변화가 가능할 리 없다. 변화란 선명한 ‘대의’를 넘어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리더십을 발휘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특히 민주주의체제에서 과감한 개혁이란 이해관계자의 정치적 동맹을 통해 가능했다. 동맹을 만들려는 숙고없이 무정형의 여론 동원에 그친다면, 문제해결이 어려워지고 변화를 위한 길목에 동료 시민끼리 서로를 아프게 하는 불필요한 감정적 적대만 쌓이기 쉽다.

대통령이 방향을 결정하고 일방적 방침을 행정부에 하달해, 친위부대에 가까운 정당으로 재편하면 개혁이 가능할까. 그런 방식으로 좋은 변화도 불가능하고 갈등만 증폭될 뿐이다. 우리 사회는 이제 대통령 일방의 명령으로 운영되지 않을만큼 복잡한 사회가 되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대통령은 ‘계몽군주’도 아니고 권위주의 체제의 통수권자와도 그 성격이 다르다. 오직 민주주의 제도 내에서 권력을 절제해 조정이란 정치행위를 훌륭하게 해내는 리더만이 좋은 변화를 만들 수 있다.

셋째, 우리 노동운동이 이른바 ‘강성’이라 불리는 이유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노조조직률이 높고 그 힘이 막강한 나라일수록 조합원들은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 투쟁만 하지 않는다. 이유는 분명하다. 노동조합이 사용자나 정부의 대화와 협상의 파트너인 것은 물론 기업운영과 국가기구에 적극 참여하기에 제도 내 권력을 행사할 수 있어서다. 거리에서 정부에 ‘촉구’하기보다 사용자와 정부와 직접 교섭하면 된다. 조직노동에게 기업운영은 물론 국가의 공동통치자에 가까운 책임과 역할이 주어지니 노동뿐 아니라 경제‧복지‧사회 전분야 전문가이자 협상가로 진화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노동 현장은 여기가 19세기인가 싶게 법이나 제도가 무색한 치외법권 영역이 많다. 세상 어느 직장인도 집단행동은 부담스럽지 않은 경우는 없다. 그럼에도 절박한 사정이 있어 나섰지만, 그 자체를 불온시하거나 교섭 자체에 응하지 않는 경우도 상당하다. 아직도 노동자의 상당수는 일단 사용자에게 ‘대화 테이블’로 나와달라 요구하느라 너무 많은 열정과 시간을 소모한다. 교섭 전부터 노사 간 불필요한 적대만 쌓이니 원만한 협상은 어렵다. 우리 사용자의 상당수는 노조가 딴지를 걸고 임금이나 올려 기업 운영에 지장이 생길까 두려워한다. 그런데 노조가 기업운영의 한 축이 되고 이윤 창출을 함께 고민하면 생산성과 임금의 연동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노조가 형식적 위원회 참여를 넘어서 나라의 중요 정책과정에 실질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조합원을 넘어 공동체 전체에 대한 장기적 시각 속에 타협이 가능하다는 것이 수많은 민주주의국가의 경험이다. 이견을 말하는 상대,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이 불편하지 않은 이는 없다. 우리도 불편한 이웃과 동거하며 협력하는 방법을 쌓아갈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그 경험이 진화하려면 갈등을 조정할 수도 부추길 수도 있는 정치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노동하는 시민의 대표조직을 적대시해서 일하는 시민의 삶을 개선할 방법은 없다. 노동시장의 불평등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일단 시민의 자율적 결사체인 노조혐오부터 중단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선거나 여론조사나 거리에만 있지 않다.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 속에 차이를 확인하고 조정하려는 ‘정치적 말’이 좋은 변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정혜윤

정혜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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