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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고문은 국회미래연구원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정혜윤] 기술과 노동을 생각하는 방식, 변화를 희망하며

작성일 : 2022-04-27 작성자 : 통합 관리자

기술과 노동을 생각하는 방식, 변화를 희망하며 글. 정혜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2022.4.27



기술과 노동을 생각하는 방식, 변화를 희망하며



  1.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넘어설 거라는 공포는 오래되었다. 다만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없앤다 두려움을 자극하는 보도는 기술에 대한 단선적 이해와 대응을 부추길 수 있다.

  2.  ‘기술결정론적 숙명론’은 기술변화가 사회적 진공에서 일어나듯 가정한다. 그런데 기술혁신이란 해당 국가의 고유한 정치·사회경제적 조건에 좌우된다. 일자리와 노동문제는 사회제도와 행위자 간 조정의 문제이지 기술의 단순 결과값이 아니다. 기술발전과 기업 혁신, 노동자의 고용과 실업이란 기업운영과 ‘시장’을 통제할 수 있는 노사관계 및 노동의 정치적 힘 수준에 크게 좌우된다. 많은 연구는 선진 민주주의국가에서 기술혁신이 경제구조에 가져온 변화는 공통되나 노동에 미친 영향은 차별적이라 밝힌다. 평등주의 제도를 갖춘 북유럽국가의 경우 신기술 도입과정에 노동자들이 작업공정과 숙련과정에 깊이 관여하며 숙련도가 전반적으로 향상된 반면, 유독 미국에서 불평등이 심해졌다는 내용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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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물론 미국은 잘 발달한 대학교육, R&D 시스템, 주주의 단기적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들이 막대한 자금조달을 통해 바이오나 인공지능과 같은 ‘급진적’ 기술혁신을 꾀했고, 이는 성장의 새로운 동력이다. 그러나 조직노동과 이에 기반한 정당의 힘이 허약하다 보니 시장의 논리가 우선했고, 실업은 사회보다 개인의 책임이 강조된다. 해당 산업의 종사자에 대한 보호보다 새로운 이윤 창출을 위한 혁신이 우선이다. 2019년 켄 로치(Ken Loach) 감독의 <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라는 영화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택배기사를 통해 보호받지 못하는 ‘종속적 자영업자’의 현실을 보여준다. 데이터 기반의 물류 혁신으로 급성장한 아마존 같은 회사가 최소의 규제조차 비껴가 어떻게 약탈적으로 이윤을 축적했는지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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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반면 북·서유럽 국가처럼 정부와 금융을 통해 장기적 자금조달과 노동 간 협력·통제를 통한 기업운영이 주요할 경우, 기술발전도 시장 논리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세계화 과정에서 약화 되었으나 여전히 노동조합이나 사민주의 정당과 같이 일하는 이들의 권력이 강하기에, 직업훈련이나 실업보험 등 노동자의 장기적 사회정책 속에 제도적 조정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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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신기술은 잘 발달한 도제교육 시스템과 노사협력적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배경하에 작업장의 ‘점진적’ 혁신이 중심이다. 가령 제조업과 정보통신기술의 융합 혁명이라 불리는 독일의 ‘인더스트리 4.0(Industry 4.0)’정책은 ‘노동 4.0’ 같은 노동정책과 함께 추진, 독일 금속노조(IG Metall)가 참여해 주도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독일은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여전히 제조업 강국의 위상을 유지하면서도 극단적 불평등이나 사회 해체를 경험하지 않았다. 조직노동의 적극적 참여 속에 단계적이고 점진적 변화를 이루어서다.

  9.  한국은 상당 수준의 기술발전을 이루었고 몇몇 영역은 ‘K 브랜드’로 명명될 정도로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그러나 혁신 과정에서 발생하는 리스크는 온전히 개인의 몫이었다. 일하는 사람을 위한 인력 재배치나 노동자 재교육, 실업수당과 같은 사회안전망은 미비하다. 기업 간 경쟁이나 구조조정으로 발생하는 일자리를 잃어도 ‘시장’의 논리가 우선이다. 실업으로 노동자 개인뿐 아니라 그 가족까지 곤궁해지는 현실은 여전하다. 2021년 한국일보의 <중간착취의 지옥도>란 기획기사는 노동의 참여나 개입 없이, ‘기술이 무매개적으로 확대·적용되면’ 일하는 이의 삶이 얼마나 열악해질 수 있는지 현장을 드러낸다. 신의 직장 ’공기업‘이라 불리는 코레일은 디지털화와 비용 절감을 이유로 주요역 매표와 관리업무를 외주화했는데 역장이라 불리는 이조차 한달 월급이 170여만 원으로 중간에 떼이는 돈이 130여만 원에 이른다. IT 개발자들은 파견인력업체를 통하는 게 일상이지만 원청에서 받는 비용의 40%만 임금으로 받고 중간업체는 60% 이상을 챙겨도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운 합법적 착취의 영역이다. 기자는 취재 중에 340만 명에 이르는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월급여가 200만 원은커녕 90만 원, 100만 원도 허다했다 토로한다. 1990년대 후반부터 기업들은 디지털화를 통한 비용 절감과 합리화를 선전했으나, 사실 해당 업무만 외주화해 그 비용을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전가한 경우도 상당함을 알 수 있다. 규제 없는 영역에 중간업체나 원청계열사들이 막대한 이윤착취의 장을 형성했다. 코로나19 이후 배달앱과 온라인배송업은 급성장했지만 그만큼 규제와 법망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의 과로와 죽고 다치는 희생 속에 뿌리내린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노동시장의 극단적 서열구조가 엄연하다 보니 ‘혁신’을 책임질 청년들은 ‘실패’를 최소화할 수 있는 공공부문과 같은 안정된 일자리를 위한 경쟁에 치중한다. 개인이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지불 비용이나 리스크가 감당할 수 없다 보니 출산과 양육을 포기하는 이들이 급증했다. 한국의 ‘기술발전’은 상당한 수준인데 왜 공동체 전반의 동력이 되지 못할까.

  10.  문제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다. 기업에서 기술을 수용·발전시키고 작업장에서 생산을 담당하는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개입하고 조정할 수 있는가가 핵심이다. 이들이 생산과정에 관여하지 못하거나 배분에서 소외된다면 기술을 둘러싼 고용과 노동의 선순환은 어렵다. 기술 속도에 개인이 빨리 적응하란 압박보다 대다수 일하는 시민이 변화 과정에 조직적으로 참여하고 개입할 방법을 고민할 시점이다.

  11.  지난 200년간 일하는 사람이 참여하고 개입한 방식은 조직이었다.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자집단은 노동자다. 기업에 고용된 개인은 약하지만, 집단으로 결사하면 막강한 기업 집단과 국가 관료제와 비교적 대등한 교섭이 가능하다. 노동이 조직적으로 기업운영과 정당을 통해 국가 통치기구에 참여해 불평등이 불가피한 자본주의 내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노동권 보호와 복지확대를 꾀할 수 있었다. 이것이 현대 민주주의의 역사이기도 하다. 어느 나라나 기업 집단의 영향력은 크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도 노동을 배제하는 정도가 덜할수록, 그리고 이들의 지지를 받는 정당들도 상당한 득표를 하고 집권 전망이 있는 나라들이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게 살 가능성이 높아진다. 14%의 낮은 노조 조직률, 약한 노동기반 정당이 우리가 처한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냉소보다 이론과 제도를 뛰어넘으려는 인간의 노력이 변화를 이끈 것도 사실이다. 조직화하기 어려운 이들의 의사가 대표될 수 있도록 공제회나 노동회의소 등 여러 방법을 찾는 길도 중요하다. 한국의 주요 정당이 더 빠른 기술개발만 강조하며 과거식 발전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방안을 모색해야 현실의 진전이 있겠다. 일하는 사람을 ‘사후 비용’이 아닌 참여와 개입의 대상으로 삼도록 국회가 역할을 다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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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미래의 기술 변화는 속도전이 아니다. 기술은 곧 대다수 일하는 사람들의 삶과 노동 전반을 좌우한다. 이제 기술과 노동을 생각하는 익숙한 방식부터 변화하길 희망한다.


  14.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정혜윤

    정혜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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