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래기고   >   미래생각

미래생각

대한민국의 미래를 예측하고 대응전략을 마련하는 미래연구원 연구진의 기고문입니다
(본 기고문은 국회미래연구원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김태경] 누구의 평화의 미래를 만들 것인가

작성일 : 2022-04-06 작성자 : 통합 관리자

누구의 평화의 미래를 만들 것인가 글.김태경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2022.04.06



누구의 평화의 미래를 만들 것인가


파시즘의 파고에 전운이 깊어지는 1936-1937년 버지니아 울프는 ’3기니’(Three Guineas)를 썼다. 스페인 내전 기간에 쓰인 이 에세이는 우리가 어떻게 전쟁을 막을 수 있을까를 물은 익명의 편지에 대한 늦은 회신의 형식을 취한다. 울프는 편지를 보낸 이가 먼저 제시한 평화를 위한 세 가지 제안(반전선언문 서명, 반전단체 가입과 기부)에 대해 그녀가 받은 다른 두 가지 기부금 요청, 즉 여성을 위한 대학 재건과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의 구직 지원을 우선 논한 다음에야 반전평화 단체 기부와 가입의 주제에 답한다.

전쟁이라는 반인도적 행위를 막기 위해 여성의 고등교육, 사회진출, 반전평화 단체, 세 가지 아이디어에 1기니씩, 자신의 3기니를 기부하겠다는 울프의 논변은 최종적으로 반전평화 단체 가입에 대해서는, 서명하는 대신 역사상 가부장제의 낡은 사회질서 밖에 위치해온 여성, ‘아웃사이더’들의 새로운 반전평화 단체를 통해 (자신이 이미 1기니를 기부하겠다고 한 기존의 반전평화 단체와 협력해) 전쟁 반대에 기여하겠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전쟁은 여성의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의 정치, 제도, 심리가 만들어낸 남성의 산물로, 사실상 여성은 전쟁의 비극을 막는 데 있어 남성과 같은 책임도, 현실적 역량도 (1919년부터 법 개정으로 6펜스 정도를 버는 경제적 활동을 시작했기에) 미미하다고 토로하는 울프의 에세이는 강렬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 동시에 상당한 분량의 ‘팩트체크’를 진행한다. 숱한 실증적 사실을 대며 논쟁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도발적 에세이는 당대 인기가 저조했지만, 1930년대 당시는 물론 19세기, 그 한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의 삶의 현실, 전쟁의 참상과 가부장제 사회구조에 대한 고발과 현실을 뒤집는 사고실험에 가까운 혁신적 상상을(예를 들어 군대에서처럼 가사노동에 대한 국가 차원의 임금을 부여하는) 버무려, 전쟁을 반대하는 ‘우리’ 안의 차이를 직시하도록 만든다.

미국이 아프간, 이라크에서 전쟁을 일으킨 2003년 비평가 수전 손택은 1938년 ‘3기니’에서 어떻게 우리가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에 울프가 대답한 방식에 새롭게 문제를 제기한다. 손택은 울프가 여성과 남성 사이에 보편적 ‘우리’란 없다는 것을 부정한 이후,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기록한 사진들, 즉 감각에 직결되는 ‘사실’에 대한 증거 앞에서 남성이든 교육의 수혜에서 벗어난 여성이든 인간이라면 똑같이 전쟁을 혐오한다는 지점에서 다시 ‘우리’를 상정한 것을 비판한다.

손택은 미국인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2001년 9월 뉴욕타임스에 실린 타일러 힉스의 3개의 컬러사진 연작을 상기시키며, 나토 병사들이 진격하며 발견한, 탈레반 병사가 목숨을 구걸하다가 죽는 과정을 담은 그 사진들의 처참함을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누구나 전쟁을 반대하도록 일으키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사진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넘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디지털 화면으로 보는 지구의 다른 편의 독자, 시청자에게 어떤 사진, 누구의 잔인성, 누구의 죽음들은 보여지지 않고 있는가의 문제라고 역설한다. 두 번의 대전, 스페인 내전 등 끊이지 않는 전쟁을 살았던 울프가 이 전쟁이 누구의 것인가를 비판했다면, 손택은 우리가 이 현대전에서 보는 것이 어느 타인의 고통인가를 물어야한다고 강조한다.

2015년 노벨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체르노빌의 기도>,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마지막 목격자들> 등 구소련 사람들의 삶 중에서도 침묵된 목소리들을 전면에 드러내는 작품들을 썼다. 알렉시예비치가 기록한 ‘붉은 인간’, 호모 소비에티쿠스들의 삶 깊숙이 거의 언제나 자리를 차지한 것은 전쟁(2차대전, 아프간전쟁, 체르노빌재난)이었다. 혁명과 평화의 이상을 위해 전쟁에 대비하고 헌신하는 삶,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살았던 소련의 삶에 대해 특히 묻혀 있던 여성, 어린이의 목소리를 불러냄으로써 알렉시예비치는 그 사회의 관찰자이자 가담자로서 윤리적 성찰을 지속한다. 1930년대 참전하지 않은 젊은 남성에게 비겁자라며 ‘하얀 깃털’을 건넸던 영국 여성들처럼, 소련의 여성들도 직접 전투와 전쟁물자 공급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알렉시예비치가 기록한 수많은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는 전쟁의 상흔을 넘어온 이들의 진실, 즉 전쟁 반대, 평화 옹호로 수렴한다. 알렉시예비치가 보여주는 구소련인들의 마음은 냉전으로 대치했던 ‘타인’들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생각에 다가서게 만든다.

2월 24일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5주를 넘어섰고 유엔에 따르면 3월 27일 현재 파악된 민간인 사상자는 1119명, 부상자는 1790명이며 100명이 넘는 어린이가 목숨을 잃었다. 387만명이 해외 난민이 됐고 인구의 4분의 1인 천만명 가까이 전쟁의 피해를 입었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나토에 따르면 러시아군 사망자는 최소 7000명에서 1만 5000명에 이른다. 28일 더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는 전쟁 중 성폭력을 당한 우크라이나 여성의 첫 증언이 나왔다. 정전 체결 이후 내년에 70년이 되는 한반도는 여전히 정전을 평화로 전환하는 평화협정, 협정 이후의 평화구축에 이르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요구하는 동시에, 지금 여기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을 지속 가능한 평화구축으로 전환하는 문제에서 우리는 누구의 어떤 평화를 말하고 실천할 것인가. 2022년 마리우폴의 공습은 1950년 평양과 서울의 폭격, 1940년 런던의 공습을 상기시킨다. 매일 저녁 공습에 모든 생각이 정지하는 순간들의 경험을 적으며 어떻게 영국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모두의 마음을 변화시킬 것인가를 질문한 울프의 ‘공습 중 평화에 대한 생각’은 지속 가능한 평화의 미래를 위해서 끊임없이 소외되고 배제되어온 시민들의 평화 만들기의 참여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김태경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김태경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공공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