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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고문은 국회미래연구원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이상직] 근대적 라이프코스의 형성 Ⅰ: 국민과 노동자의 탄생

작성일 : 2022-03-30 작성자 : 통합 관리자

근대적 라이프코스의 형성 Ⅰ: 국민과 노동자의 탄생


근대적 라이프코스의 형성 Ⅰ: 국민과 노동자의 탄생


근대적 라이프코스가 만들어진 과정은 정상성이 만들어진 과정이자 비정상성이 만들어진 과정이었다. 그 과정의 성격은 근대 국가와 근대 노동시장, 근대 가족이 형성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오늘날 우리 생애를 틀 짓는 핵심 제도이자 우리 정체성의 핵심 준거다. 이들은 우리 생애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차원을 각각 규정짓는 장치다. 이번 글에서는 국가와 노동시장에 초점을 맞춘다. 가족은 다음 글에서 살펴볼 것이다.

근대적 정체성의 가장 넓은 범주는 ‘국민’이다. 우리의 일상은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근대 국가의 틀로 짜여 있다. 국가라는 경계로 사람들이 같은 시간과 공간을, 같은 언어를, 같은 법적 규율을 공유한다는 객관적 관계 측면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한국민이라는 기억과 의식을 공유한다는 주관적 관계 측면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국적은 전 세계 인류 대다수가 귀속되는 범주이기도 하다. 여러 국적을 가진 사람이 있고 난민도 있지만 그들의 존재조차 국적이라는 범주에 근거한다.

근대 국가가 정립된 공식적 계기는 1648년에 유럽에서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이다. 근대 국가 형성의 핵심 기제는 전쟁이었다. 우리라는 의식은 그들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그들은 보통 적이다. 적과 싸우면서 우리라는 의식이 생긴 것이다. 근대 국가 형성 과정에서 인종주의 담론과 우생학이 등장한 것도 이러한 ‘전쟁’ 관계를 반영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라는 의식은 많은 경우 생물학적 의미에서의 민족과 연결되었지만 국민과 민족이 일대일로 연결되지는 않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이런저런 분쟁이 있다.

한국이 근대 국가 체제에 편입된 때를 언제로 볼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인 1919년 4월 11일을 시작점으로 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은 1948년 8월 15일이다. 한국민은 인종이나 민족과 국민의 경계가 포개지지 않아서 발생하는 갈등과 긴장을 상대적으로 덜 겪었다. 그러나 한국인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서 ‘나라 없는’ 민족으로 근대를 시작했다. 이것이 한국의 민족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식민지 경험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인종주의 담론과 우생학에 대해 양가적 감정을 갖게 했다. 양가감정은 민족에 대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낳았다.

1945년 8월의 해방은 ‘한국민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둘러싼, ‘한국이 어떤 나라인가’라는 질문을 둘러싼 경쟁을 격화시켰다. 수많은 입장이 제시되었고, 각 입장에서 사람과 자원이 동원되었다. 이들 간 경쟁은 폭력의 형태를 띠었다. 1946년 10월에 대구 항쟁이 있었고, 1947년 3월~1954년 9월에 제주 4.3 사건이 있었다. 1948년 10월에는 여순 사건이 있었다. 1950년 6월에 시작해 1953년 7월에 ‘멈춘’ 한국전쟁은 그 경쟁이 극단적 폭력으로 터져 나온 사건이었다. 이들 과정에서 많은 한국인이 많은 한국인을 죽였다. 그리고 죽었다. 1980년 5월에는 5.18 민주화 운동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국민 만들기’의 경험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부모대 또는 조부모대만 해도 누구나 한 번쯤은 너는 어느 편이냐고 추궁당하는 자리에 있었고 한 번쯤은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자리에 있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한국민이라는 범주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것은 최근에 와서다. 그리고 그것의 경계는 지금도 확정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확정되지 않을 것이다. 분단 상황은 여전히 한국인과 한국민의 경계 틈새에서 긴장을 유발한다.

한편 근대 국가는 부의 축적을 필요로 했다. 전쟁은 자본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국민은 군인이자 납세자로 자리 매겨졌다. 특히 후자의 역할은 곧 생산자(근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치경제체제는 성인 남성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앞선 글에서 산업경제체제로의 전환이 유년과 노년을 성년으로부터 분리시켰다고 언급했다. 한국의 경우 산업화 시점이 늦고 초기에는 그 수준도 높지 않아 유년과 여성 노동이 더 오랫동안 이용된 측면이 있다. 한국전쟁 등 정치적 격변이 이어지면서 남성 노동력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측면도 있다. 그렇지만 노동이라고 하면 우리는 여전히 성인 남성의 일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생산인구’도 그러한 전제에 바탕을 둔 개념이다. 만 15-64세로 구획되는 생산인구는 경제활동인구와 비경제활동인구로 나뉜다. 전업주부 등은 비경제활동인구로 여겨진다. 생산인구는 실질적인 ‘생산’ 또는 ‘경제’ 활동 가능 여부와 관계없이 구획된다.

근대 노동시장 형성의 또 다른 의미는 장애 개념의 등장이다. 근대 산업사회 이전에도 오늘날 우리가 장애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리를 저는 사람, 맹인, 농인, 반편이 등으로 불렸을 뿐 장애라는 개념으로 포착되지 않았다. 농업과 가내 수공업에서는 손상된 육체를 지닌 사람들도 집단적 노동력의 일부로 나름의 속도와 방식으로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산업화된 생산체제에서 장애인의 노동은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심신장애자복지법’이 제정된 1981년 이전까지 장애 개념 정의가 분명치 않았던 것도 장애 개념이 산업화와 밀접하게 관계 맺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을 장애인으로 분류한 잣대는 ‘정상적인 신체’였다. 일할 수 있는 몸(the able bodied)의 잣대로 일할 수 없는 몸(the disabled body)이 규정되었다. 쓸모를 잃은 이들은 ‘시설’로 보내졌다. 오늘날 장애인 운동가들이 장애 운동을 근본적으로는 반자본주의 운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장애 개념이 자본주의와 함께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근대 사회에서 장애인의 삶이 좋아졌다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을 ‘병신’이라고 부르지 않고 장애인이라고 부른다. 과거에 장애인이 이런저런 비공식 경제활동으로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다면 오늘날 그들은 국가로부터 일정한 공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장애/비장애라는 범주는 유지되고 있다. 복지도, 권리도 그러한 구별을 전제한다. 이진섭 씨는 『우리 균도』에서 아들 균도가 “장애 등급을 받지 않고 그저 ‘특이한 아이’로 남기를 바랐다”고 썼다. 그렇지만 그는 결국 부산장애인복지관에서 균도를 등록하고 ‘장애 1급’을 받았다. 발달장애아로 규정된 “아들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고, 스스로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1급 지체장애인’ 김원영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서 이렇게 썼다. 장애인이 “법의 보호와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바로 그 보호가 필요한 이유인 ‘속성’ 또는 ‘배경’ 안으로 한 사람의 인격을 온전히 구겨 넣”어야 한다고.

근대 국가와 노동시장의 형성으로 개인의 생애는 국가와 자본의 규율에 따라 표준화된 방식으로 규정되었다. 그것을 추동한 사회 변동의 원리는 생명의 합리화(도구화)였다. 사회의 합리화는 경제 영역에서는 자본주의 시장의 확립으로, 정치 영역에서는 민주주의 정체의 확립으로 나타났다. 시장에서 개인은 가격이 주는 신호만을 고려해 자신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수단과 절차를 고려하는 ‘합리적’ 행위자다. 개인 관계는 비인격적인 시장 관계에 지배된다. 국민 국가에서 개인은 보편적인 의무와 권리를 지닌 시민으로 국가와 직접 연결된다. 정치 영역에서의 관계 또한 비인격적 규칙에 따라 조직된다. 두 영역 모두에서 사람들은 ‘개인’으로 존재한다. 시장과 국가의 형성으로 개인은 ‘사회’로부터 해방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개인은 비장애 (백인) 성인 남성이었다는 점이다. 시민 자격으로서의 시민권은 자본주의적 노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장애인과 여성은 ‘해방’되지 못했다.

사회로부터 떨어져 나온 개인의 삶을 떠받치는 핵심 조직 원리는 관료제와 개인주의 이데올로기다. 인구와 국민, 정상인이라는 개념의 형성은 국가 단위로 생명을 관리하는 시각을 낳았다. 이것은 다름 아닌 자유주의의 가치에 기반해 성립되었다.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가치는 자유를 온전히 행사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지는 존재를, 타인의 자유를 해칠 것으로 예측되는 존재를 제약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구금 제도는 이동의 ‘자유’라는 법적이고 정치적 개념이 발명된 시기에 확산되었다. 우생학의 그늘은 오늘날에도 드리워져 있다.

다음 글에서는 근대 가족의 형성에 주목해 근대적 젠더 관계가 형성된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이상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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