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래기고   >   미래생각

미래생각

대한민국의 미래를 예측하고 대응전략을 마련하는 미래연구원 연구진의 기고문입니다
(본 기고문은 국회미래연구원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조해인] 초현실주의적 영감이 필요한 지금

작성일 : 2021-12-22 작성자 : 통합 관리자


초현실주의적 영감이 필요한 지금


스페인 피게레스의 달리 극장 박물관에서 얻었던 감동을 다시금 찾고자 하던 때, 초현실주의 화가 전시회를 최근 다녀오게 되었다. 초현실주의라는 말은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의 희곡에서 유래되었지만, 1924년 앙드레 브레통(André Breton)의 ‘초현실주의 제1선언’으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기존 전통, 이성, 합리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이 커질 때, 문명의 속박과 이성의 구속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 비합리적 인식과 잠재의식의 세계를 추구했던 예술운동이다.


꿈과 무의식을 탐구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초현실주의 작가 중 대표적 인물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이다. 무의식이 드러나는 꿈속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한 그의 작품은 혼동과 경이로움으로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아프리카의 인상 (Impressions d'Afrique)’ 에서도 꿈의 이미지가 드러난다. 그의 연인 갈라(Gala)의 얼굴은 구름처럼 흐리게 번져 나가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달리의 일부는 섀도잉이 되어 그의 한쪽 눈과 그림 밖으로 나올 듯한 손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잠재의식의 이미지를 포착하려는 그의 모습이 느껴진다.


달리가 꿈의 세계에 주목했다면, 벨기에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는 비이성적인 현실을 묘사하며 현실의 인식에 도전했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파이프’를 그려두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Ceci n’est pas une pipe)’ 라고 말하는 ‘이미지의 배반 (La trahison des images)’ 일 것이다. 관습을 따르면 그 이미지는 ‘파이프’가 맞지만, 그림 속 물건은 다른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재와 허구의 차이를 보이며, 이미지와 언어가 갖는 모순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이번 전시회에서 보고자 했던 그림 중 하나는 ‘금지된 재현 (La reproduction interdite)’ 이었다. 또 다른 마그리트의 작품이다. 한 남자가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데 거울에 비친 모습은 그 사람의 뒷모습이다. 우리가 살면서 평생 볼 수 없는 모습이 거울을 통해 보는 내 뒷모습이다. 그 이성을 깨며 마그리트가 거울 속에 뒷모습을 담아낸 걸 보면 혼돈과 동시에 경이로움을 얻게 된다.


‘빛의 제국 (L'Empire des Lumieres)’ 역시도 유명한데, 같은 주제로 10편 이상 제작되었다. 지상의 어두운 집을 통해 밤, 저녁 시간의 이미지를 보이지만, 하늘의 시간은 낮이다. 공존할 수 없는 것을 한 캔버스 안에 담으며 논리를 뒤집고자 했다.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으론 분리되어야 할 두 시간대가 같은 공간에 배치되며, 보는 이들에게서 의아함을 자아내지만, 이 의아스러움 뒤엔 항상 영감의 순간이 뒤따른다. 우리가 가진 사고의 한계, 한정성을 뛰어넘은 그들의 예술이 우리가 얼마나 상자에 갇힌 생각만 하고 지냈는지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은 우리가 ‘상식’이라는 이름 아래 규정한 언어와 이미지의 관계, 시간과 공간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왜곡시켜, 보는 사람들이 관습적인 인식에서 벗어나도록 해준다. 사회가 만든 규제, 논리와 이성의 기준을 깨고, 우리 사고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 이들의 예술의 방향이었다. 익숙했던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고 당연하다고 여긴 상식에 도전할 때, 본질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시간, 공간의 영역이 허물어지고, 제한 없는 상상력이 존중받으며, 의아스러운 충격이 경이로운 영감이 되고, 다름이 틀림이 아닌 세상을 구축하고자 했던 그들의 예술은 부조리한 현실을 초월하고, 당시 시대가 갖는 불확실성과 불안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지금의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코로나 팬데믹의 종식은커녕 재난이 일상이 된 지금,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경제성장이 국민의 생명 보장보다 중요할 순 없음을 확인했고, 우리 사회가 또 다른 미래 위험에 맞서 대응하고 극복할 수 있는 충분한 회복 탄력성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했다. 불확실한 사회에 살며, 현실에 도전하고 사회적 구조에 질문을 던졌던 초현실주의 작가들처럼 지금은 어쩌면 이성적인 사고를 뛰어넘어, 익숙한 현실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한 때다. 예상치 못한 충격은 미래에도 올 것이며, 오늘의 정답이 내일은 아닐 수도 있다. 세상의 상식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제한 없는 상상력을 펼칠 때, 미래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사고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다시 달리의 그림을 보다, 그의 ‘녹아내리는 시계’에 주목하게 되었다. 코로나 19로 인한 락다운 (lockdown), 그리고 멈춰버린 시간이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규칙적이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시간을 초월해 우리의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달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조해인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