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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고문은 국회미래연구원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박상훈] 포퓰리즘은 민주적인가

작성일 : 2021-10-20 작성자 : 통합 관리자


포퓰리즘은 민주적인가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


포퓰리즘(populism)의 전성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적어도 내년 봄 대통령 선거 때까지는 포퓰리즘이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키워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서구의 경우 포퓰리즘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정치 용어로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이후라 할 수 있다. 정치 논쟁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진지한 학문 연구 분야에서도 그랬다. 영국 서섹스대학의 폴 타가르트(Paul Taggart) 교수는 1990년대를 포퓰리즘 연구의 “폭발(bursts)”로 특징짓는다. 포퓰리즘이란 단어가 제목에 들어 있는 논문과 책은 1990년에서 2000년 사이 1500건 이상 발표되었다.


포퓰리즘학(populism studies)이라는 학문 분야도 생겼다. 2000년대 들어서 포퓰리즘 연구는 더욱 많아졌다. 2017년에는 500건 이상의 포퓰리즘 연구가 쏟아졌고 같은 해 '케임브리지 사전(Cambridge Dictionary)'은 올해의 단어로 포퓰리즘을 선정했다. 서구보다는 늦었지만, 우리도 본격적인 포퓰리즘 논쟁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과거 포퓰리즘은 주로 집권 정부의 개혁 드라이브를 둘러싸고 잠깐 등장했다가 잦아들었던 이슈였다.


김영삼 정권이 주도했던 ‘문민 개혁’과, 노무현 정권 시기 ‘행정수도 이전’과 ‘4대 개혁 입법(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진상규명법, 언론관계법)’을 둘러싼 논란이 대표적인 예이다. 정도는 약했지만, 다른 정권에서도 대통령이나 집권당 주도의 개혁이 시도되거나 ‘4대강 사업’과 같은 메가 프로젝트가 추진될 때마다 포퓰리즘 논란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지금은 다르다. 일회성 논란이라 보기 어렵다. 모든 정당이 서로를 향해 포퓰리즘이라고 공격하고 있다. 같은 정당의 대선 후보 경선에서도 포퓰리즘 논란이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허경영식 포퓰리즘’, ‘기본소득 포퓰리즘’에 이어, 반(反) 페미니즘 정서를 동원하는 정당을 향해서는 ‘극우 포퓰리즘’라는 비판도 등장했다. 여는 야를 향해, 야는 여를 향해 진보는 보수를 향해, 보수는 진보를 향해 모두가 포퓰리즘이라는 비난을 앞세우는 상황이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포퓰리즘 문제가 제대로 따져졌으면 한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쟁점은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이다. 포퓰리즘은 민주적인가, 아니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병리 현상인가.


포퓰리즘과 민주주의는 한 가지 중요한 정치 원리를 공유하고 있다. 한 나라의 정치 체제는 민중(people)의 의사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정치학에서는 이를 가리켜 ‘민중 주권(popular sovereignty)’의 원리라 부른다. 포퓰리즘만큼 민중 주권을 더 열정적으로 주장하는 정치 운동은 없다. 민중의 주권적 의지로 움직이는 국가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은 민주적이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 발전에 좋은 자극제가 될 수 있다. 현실의 민주주의는 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고 정치 엘리트나 기성 정당들 사이의 협애한 권력 경쟁으로 퇴행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포퓰리즘은 기성 정치에 대한 대중적 비판과 반체제적 열정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포퓰리즘이 갖는 그런 원초적인 에너지는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좀 더 반응적이고(more responsive) 좀 더 책임 있고(more accountable) 좀 더 효과적인(more effective) 방향으로 이끄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이 점에서도 포퓰리즘은 민주적이다.


포퓰리즘의 영향력이 커진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의 민주주의가 나빠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 점에서 포퓰리즘은 한 나라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건강한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의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말해 포퓰리즘 정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 정도와 기존 정당들에 대한 불만의 함수”다. 사회가 불평등해지고 양극화나 격차가 커지는데도 이에 책임성을 보여야 할 정당들이 제 역할을 못 한다고 보는 시민들이 많아지면 포퓰리즘의 성장은 막기 어렵다. 포퓰리즘의 토양은 포퓰리스트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포퓰리스트들의 발언권을 키워주는 객관적 사회 상황에 있다. 민주주의가 정치의 힘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포퓰리즘의 위세는 커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한다는 뜻이다.


포퓰리즘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포퓰리스트들은 거의 없다. 엄밀히 말해 포퓰리즘은 포퓰리스트들의 것이 아니다. 스스로 포퓰리스트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비판을 받으면 아니라고 거부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포퓰리스트들이 포퓰리즘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포퓰리즘의 이론화가 포퓰리스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닌 것, 정치 운동으로서 포퓰리즘이 갖는 가장 큰 특징은 여기에 있다. 그 점에서 반(反) 포퓰리즘은 포퓰리즘의 위세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포퓰리즘이라는 공격에 대한 포퓰리스트의 대응은 어렵지 않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우파 포퓰리스트인 장 마리 르팡은 자신을 포퓰리스트라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해 봅시다. 포퓰리즘은 민중의 의견을 중시한다는 뜻 아닌가요. 민주주의에서 민중이 의견의 권리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는 사람을 포퓰리스트라고 한다면, 그럼 나는 포퓰리스트입니다.”


진보파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포퓰리즘을 반대한다면, 진보의 근본적인 정체성을 위협받는다. 현대 민주주의는 엄밀히 말해 포퓰리스트 민주주의(populist democracy)와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의 혼합 정체(mixed regime)로 정의할 수 있다. 인민주권과 같은 포퓰리즘적 요소가 없다면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자유주의뿐이다. 근대 시민혁명을 거치며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자유주의의 정치 이상은 입헌주의(constitutionalism)를 통해 구현되었다. 입헌주의는 ‘기본권 보장’과 ‘제한 정부’의 원리로 이루어진다. 이 역시 거부할 수 없는 민주적 가치가 있지만, 현대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의 원리로만 작동한다면 시민의 다수를 구성하는 사회 중하층의 평등한 삶은 보호되기 어렵다.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은 이렇다. 현대 민주주의는 인민주권과 입헌주의 사이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작동하는 체제이다. 체제의 균형이 자유주의 쪽으로 기운다면 포퓰리즘에 대한 정치적 수요는 커진다. 그때의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에 반(反)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에 반(反)한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중시하는 진보파라면 포퓰리즘의 민주적 요소를 체제 안으로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해서 포퓰리즘이 갖고 있는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의 영향력을 제어하는 한편, ‘비민주주의적 자유주의(undemocratic liberalism)’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체제 내부의 균형을 회복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포퓰리즘은 민주적 측면을 가지며, 포퓰리즘의 도전이 민주주의의 발전을 자극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의 공존은 여기까지다. 정치 엘리트들이 민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정당들이 사회적인 요구에 무책임하고 편협하다는 포퓰리즘의 문제 제기는 옳을 때가 많다. 하지만 포퓰리즘이 제시하는 대안은 옳지 않을 때가 더 많다. 민주주의에 대해 옳은 질문(right questions)이 될 수는 있지만 틀린 해결책(wrong answers)이 포퓰리즘이다. 민주주의자라면 포퓰리즘이 제기한 문제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포퓰리스트가 될 수는 없다.


민주주의는 민중과 엘리트의 협력 체제를 지향한다. 반면 포퓰리즘은 강력한 반(反) 엘리트주의를 특징으로 한다. 민주주의는 민중의 적법한 대표로서 정치 엘리트가 공공정책을 주도하는 정치체제를 가리킨다. 엘리트 있는 정치지만 어떤 엘리트가 필요하고 어떤 엘리트를 재신임하고 해고할지를 민중이 결정하는 체제가 민주주의다. 이에 반해 포퓰리즘은 엘리트 없는 체제를 지향한다. 그들에게 엘리트는 곧 민중의 요구를 기만하고 배신하는 기득권 세력이자 특권 집단이다.


우파 포퓰리스트에게 정치 엘리트들은 자국의 민중 대신 이민자의 이익을 옹호하는 자들이다. 동성애자와 페미니스트, 난민과 같은 소수자들의 입장만 대변하는 자들이다. 자유 지상주의 포퓰리스트들에게 정당들은 큰 정부와 더 많은 세금을 요구하는 존재들이다. 인권을 앞세워 범죄와의 전쟁에 소극적인 자들이다. 좌파 포퓰리스트에게 정치 엘리트들은 대기업의 이익을 옹호하는 자들이고, 세계화를 앞세워 다국적 기업과 금융자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치 계급들이다.


엘리트 없는 정치의 다른 짝은 “순수한(pure)” 민중의 정치다. 기성 정당이나 엘리트들도 민중의 요구를 실현하겠다고 하나 그들의 약속은 신뢰할 수 없다. 그들은 순수하지 못한 집단이다. 말로만 민중을 앞세우는 존재들이다. 그들을 대신해 “진정한(authentic)” 민중의 의지를 구현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의 연설에서 보듯, “개인은 실수할 수 있고 유혹에 빠질 수 있으나, 민중은 다르다. 민중은 그 자신의 이익을 인식함에 있어서나 독립성을 유지할 방책이 무엇인지에 대해 놀랄 정도의 높은 자의식을 갖고 있다. 민중의 판단은 순수하며 그들의 의지는 강하다. 민중은 누구에 의해서도 타락하거나 위협받지 않는다.”


하지만 민중은 주권의 최종적 보루일 수는 있어도 일상적으로 통치를 담당할 수 있는 단일한 집합체가 아니다. 민중은 일반의지를 갖고 집합적 의사를 표현할 수는 있다는 점에서 정치체제의 도덕적 기초일 수는 있어도 실제로 체제를 움직이는 행위자는 될 수 없다. 따라서 포퓰리즘 운동은 순수한 민중의 의지를 말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가진 “강한 인물(strong man)”에 의존한다. 그 스트롱 맨은 유화적 태도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원색적인 주장을 앞세우는 선동가형에 가깝다. 역경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민중의 삶을 보호하는 구원자(savior)의 소명을 중시한다. 그래서 포퓰리스트 지도자는 대개 남자인 경우가 많다. 여성 포퓰리스트 지도자 가운데도 아버지나 남편의 이미지를 전승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르헨티나의 에바 페론, 프랑스의 장 마리 르팡, 페루의 케이고 후지모리 등이 대표적이다.


포퓰리즘은 현대 민주주의가 전제하고 있는 다원주의(pluralism)와 충돌한다. 포퓰리즘에서 민중은 하나의 동질적 집단의지를 갖는 존재로 이해되는바, 그때의 민중은 역사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존재다. 이런 민중관이 민주주의의 발전과 양립할 여지는 없다. 민중은 직업과 소득, 나이, 성, 지역 등에 따라 이익과 열정을 달리하는 ‘다원적 구성체’로 이해되어야 하고, 그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과 협상, 타협을 통해 민주주의가 운영된다는 생각을 받아들여야 민주주의는 작동할 수 있다.


포퓰리즘은 대의제나 의회, 정당의 역할에 부정적이다. 그들은 민중에 대한 ‘직접적 호소’를 즐기고 여론 동원 정치에서 힘을 발휘한다. 그들은 대의 민주주의의 참여 기반을 넓히고 대표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노사 간 이익정치와 정당정치, 나아가 의회정치를 좋게 만드는 일에도 소명의식이 없다. 포퓰리즘적 대중 동원이 분노의 열정과 결합해 민중들 사이에서 정치적 조급증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기성 체제나 정치 엘리트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의견을 달리 하는 동료 민중들에게 적대와 증오의 감정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 결과 합리적 공론장의 기능은 약화되고 독립언론의 역할 역시 위협한다. 특히 SNS에 의존한 포퓰리즘은 익명의 다중들로 하여금 무책임한 공격성을 표출하는 것을 조장하기도 한다. 합의의 공간은 줄고 모든 사안을 둘러싸고 승복이나 동의, 인정 없이 무한 논란으로 치닫는 양상이 심화되는 것도 큰 부작용의 하나다.


포퓰리즘이 민중 주권의 원리에서 정당성을 찾는 것도, 때로 반체제적 열정을 통해 기성의 정치질서가 갖는 경직성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것도 좋게 평가할 만하다. 특히나 포퓰리즘이 정당으로 발전해 기존 정당정치에 새로운 의제를 던지는 일에는 유해함보다 유익함이 크다. 서유럽의 포퓰리즘 정당들의 여러 사례가 이에 가깝다.


하지만 포퓰리즘이 정당정치나 의회주의를 부정하고 나아가 삼권분립과 같은 입헌주의적 제약을 벗어버리고자 한다면, 민주주의에 위협적인 결과를 낳는다. 반다원주의적 경향이 심화되거나, 분노를 넘어 사회를 적대와 증오로 분열시키는 것, 충분한 심의와 논의 대신 즉각적 해결을 요구하거나, 그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음모와 기만이 작용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민주주의는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합의 가능한 변화를 지향한다. 포퓰리즘의 조급한 시간성은 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누군가 포퓰리즘적 열정을 갖고 있다면 부디 정당을 만들고 자신들의 비전과 대안을 성실하게 마련하길 바란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이 되고 입법자도 되는 선택을 중시하기 바란다. 그렇게 해서 기성 정치에 새로운 변화를 불어넣고 또 그렇게 해서 기존의 민주주의를 합리적으로 쇄신하게 되길 바란다. 그렇지 않고 오로지 대통령 선거에 모든 것을 걸고 대의제를 넘어 민중의 직접적 지도자로 등극하고자 한다면, 또 그렇게 해서 정치적으로 성공한다면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할 수 있다. 포퓰리스트의 민주적 미래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의회주의자이며 정당정치의 중요성을 수용하는 범위에서만 개척될 수 있다고 본다.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사단법인 정치발전소 학교장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고려대학교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