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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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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고문은 국회미래연구원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전준] 정작 중요한 미래의 신호는 '너무 약해' 들리지 않는다

작성일 : 2021-08-10 작성자 : 통합 관리자


정작 중요한 미래의 신호는 '너무 약해' 들리지 않는다


전준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며칠 전 한 게임회사의 고군분투기를 담은 책을 읽었다. 지금은 전 세계의 유저들이 환호하는 전무후무한 게임을 내놓았으나, 그 길에 다다르기까지의 여정은 참혹했다. 성공 비결을 이야기해 줄 것만 같았던 이 책은, 사실 비참한 실패로 가득 차 있었다. 잔인한 장면으로 가득 차 있는, 러닝 타임이 유난히도 긴 공포 영화에 완전히 지치고 난 뒤, 마지막 장면에서 아주 잠시 구름을 뚫는 햇살이 생존자들의 얼굴을 비추는 듯했다. 생존자들끼리 얼굴을 확인했다. 환희도 흥분도 없이 그렇게 영화는 끝나버린다. 생사를 함께하던 동료들이 떠나가고, 불신과 포기가 일상이었다. 개인 부채로 직원 월급을 주며 시간을 보냈다. 기네스북의 기록을 갈아치우며 전 세계를 휩쓴 게임, 배틀그라운드의 뒷이야기다. 이 책은 실패를 버티고, 실패로부터 배워 기어코 성공했다는 뻔한 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매번 실패의 순간을 빠르게 인정하고 이를 직원들과 공유했다.


몇 년 전 프린스턴 대학 심리학과의 요하네스 하우쇼퍼 교수는 자신의 실패 이력서를 트위터에 올렸다. 지원했으나 떨어졌던 대학원, 제출했다가 거절당한 논문, 받지 못한 연구비, 최종 탈락한 입사 면접 등이 적혀 있었다. “나는 대부분의 시도에서 실패했다. 실패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몇 개의 성공만 눈에 보인다. (중략) 이로 인해 사람들은 실패의 책임을 스스로에게만 전가한다. 사실 세상은 오르락내리락하기 마련이고, 성공 확률은 희박하다.” 하우쇼퍼 교수는 실패 이력서의 의미를 이렇게 적었다. 학자들은 뒤이어 열광적으로 자신들의 실패 이력서를 만들어 공유했다. 코로나 19 시기 동안 실패 이력서는 다시 한번 회자 되며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는 젊은 학자들을 위로했다. 구도자의 길을 걷듯이 자신들을 갈고 닦은 젊은 학자들이 직업을 얻지 못한 채 진퇴양난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나는 대가들의 실패 이력서 앞에서 겸손해졌다. 수많은 추락에도, 낙법을 구사해 가며 그들은 여전히 살아남아 있었다.


실패를 버티고 나면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다는 황당한 거짓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실패를 버티는 것과 성공은 사실 별 관련이 없다. 나는 실패하는 개인의 자세와 그러한 개인의 실패가 갖는 사회적인 선한 영향력의 가능성, 그리고 그 실패의 소리가 쩌렁쩌렁 울릴 수 있도록 해 주는 사회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언젠가 한 유도 선수가 낙법의 미학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낙법을 잘 구사하기 위해서는 몸이 넘어가는 순간을 빠르게 인정해야 한다.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하는 순간 준비되지 않은 낙하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게 된다. 바닥에 내리꽂히게 될 것을 빠르게 인정하고, 최선을 다해 실패를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체육관은 바닥을 팡팡 내려치는 낙법 소리로 언제나 시끄럽다. 그 누구도 낙법 소리가 시끄럽다고 타박하는 법이 없다. 타인의 낙법 소리를 들으며, 선수들은 게임의 본질이 사실은 잘 넘기는 것이 아니라 잘 넘어지는 것임을 배운다. 넘어지는 우리들의 사회다. 낙법 소리를 듣는 작은 사회다.


미래학에서는 앞으로 미래 사회의 핵심적인 화두로 부상하게 될 수많은 후보군을 이머징 이슈 (emerging issue)라고 부른다. 이머징 이슈는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는데, 이중 가장 포착하기 힘든 것은 사회적인 발언권이 적은 집단에 의해 발신되는 약한 시그널 (weak signal)이다. 국가를 막론하고, 힘을 가진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의 관점에서 미래 사회를 규정하는 발언권을 갖는다. 마치 실패란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을 쟁취한 소수만이 정당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실패한다. 바닥에 내리꽂히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린다. 그러나 민첩하게 몸을 돌려 큰 소리로 낙법을 구사하는 소리에, 우리 사회는 그다지 우호적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실패하는 약자들의 낙법 소리를 들어야 한다. 실패 그 자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연대감과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 약하지만 주요했던 시그널이 무엇이었는지 반성하는 것은 오로지 사후적인 분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앞으로 주요할지도 모르는 약한 시그널을 최대한 경청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폭염으로 축산농가 가축 피해 7만7000마리 (농민신문, 2021년 7월 23일),” “성추행 컴플레인하면 지방으로 발령냈다 (뉴시안, 2020년 12월 1일),” “매년 산재로 사망하는 이주노동자만 100명이 넘고, 통계에 잡히지 않는 과로사나 돌연사 등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연합뉴스, 2021년 7월 27일),” “영 케어러는 만성적인 질병을 가진 가족을 돌보는 18살 미만 아동 혹은 젊은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생애주기적 과제와 돌봄노동 사이 양자택일을 강요당한다 (한겨례21, 2020년 12월 29일).” 이들이 발신하는 약한 시그널에 주목하자. 낙법 소리를 듣는 사회를 만들자.




전준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