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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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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고문은 국회미래연구원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이선화] 민주주의와 경제적 번영의 ‘좁은 통로’

작성일 : 2024-12-10 작성자 : 통합 관리자


올해 노벨경제학상은 MIT의 대런 애쓰모글루와 사이먼 존슨, 시카고대학의 제임스 로빈슨, 3인에게 공동 수여되었다. 방대한 사례와 통계 및 실증 분석을 통해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의 상호작용을 규명한 연구 성과를 인정받은 것이다. 기존의 ‘로빈슨 크루소 모형’은 왜 같은 기술과 자본을 투여해도 국가에 따라 경제적 성과가 달라지는지, 서구에서 성공한 정책이 저개발 지역에서 실패하고 국가간 부의 격차가 해소되지 않는지에 대해 뚜렷한 설명이 어려웠다. 이들은 전통적 경제학이 생략했던 역사적 경로와 제도적 맥락을 분석 틀로 끌어들였고 그간 간과해온 정치제도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경제적 불평등은 정치권력의 불평등을 낳고, 정치적 불평등은 경제제도를 왜곡하며, 이는 다시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정치와 경제는 상호작용하는 내생적 관계에 있으므로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들의 작업은 ‘포용적’ 정치제도, 특히 권력의 분배방식과 견제장치의 존재 여부가 경제발전의 동력이자 제약조건임을 실증적으로 입증했으며, 저개발 국가가 왜 착취적 제도와 불평등의 순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포용적 정치제도란 “충분히 중앙집권화되고 다원적인” 제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경제적 번영을 달성한 선진국들 또한 포용적 제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애쓰모글루와 로빈슨은 선진국으로 진입한 국가가 포용적 제도를 통한 선순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가권력과 사회권력이 균형을 이루어야 함을 강조한다(이때 ‘사회’는 시민사회나 경제사회를 포괄하는 다양한 형태의 개인의 집합체를 의미한다). 두 힘은 경제발전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며 도전받는다. 기술, 경제, 글로벌 정치 등 다양한 외생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국가권력과 사회권력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는 상태, 즉 ‘견제된 리바이어든(shackled leviathan)’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좁은 통로(the narrow corridor)’를 통과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좁은 통로’는 한번의 진입으로 유지되는 정적인 균형 상태가 아닌 이탈하기 쉬운 동적인 과정인 것이다.

이들의 연구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후퇴 현상에 대해서도 통찰력 있는 분석 틀을 제공한다. 중산층의 약화는 포용적 제도를 유지하는 힘의 균형을 깨트리는 핵심 요인이다. 그 배경에는 디지털 경제의 발전이나 플랫폼 기업들의 시장지배력 강화, 중국의 급속한 성장에 따른 권위주의 체제의 부상 등 다양한 요인들이 자리한다. 민주주의의 핵심 지지기반인 중산층의 위축과 사회적 신뢰의 붕괴는 ‘좁은 통로’로부터 양방향으로의 이탈을 의미한다. 국가권력이 사회권력을 압도하는 경우 “합법적 폭력 사용을 독점하는” 전제적 리바이어든(despotic leviathan) 상태로 이탈하게 된다. 다른 한편 의회, 사법부, 관료제 같은 권력 기구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공권력이 무력화되는 경우 ‘부재하는 리바이어든(absent leviathan)’ 상태로의 이탈도 가능하다.

포용적 정치제도와 경제적 번영의 선순환이 깨지는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복원하기 위한 해법은 정치제도와 경제정책 양면에서 제안되었다. 경제정책의 영역에서는 디지털 경제의 독과점 규제와 경제력 집중의 완화, 경제적 기회 확대를 통한 중산층 재건과 사회적 이동성 제고가 강조되었다. 정치제도의 영역에서는 특히 디지털 경제와 인공지능과 같은 기술 환경의 맥락에서 민주주의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과제가 강조되었다. 사회적 대화가 극단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소셜미디어 규제, 알고리즘 투명성 확보, 디지털 공론장의 건전화 등 견제장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특히 흥미로운 점은 한국의 번영과 북한의 빈곤 상태가 이들의 가설을 입증하는 표본적 사례로 소개되었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한국의 압도적 발전은 같은 문화와 역사를 공유했던 북한의 쇠퇴와 대비하여 재산권, 교육 기회, 시장경제, 노동조합, 시민사회와 같은 포용적 제도에 힘입었음은 자명하다. 이들 3인의 연구에서 한국의 역사는 민주주의와 경제적 성과의 선순환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12월 3일의 계엄령 사태로 인해 한국 민주주의가 처한 위기적 상황은 제도의 포용성을 높이려는 노력이 없이는 ‘견제된 리바이어든’의 균형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음을 확인시켰다. 다만 ‘좁은 통로’를 이탈하려 한 국가권력에 대항해 사회권력이 이를 막아낸 것은 한국의 제도적 회복력이 여전히 건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 미국 언론의 지적처럼 대한민국은 이번 사태가 초래한 어마어마한 경제적 청구서를 할부로 갚아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적 위기를 계기로 우리가 건강하고 포용적인 제도의 복원을 이루어낼 수 있다면 그 청구서는 더 큰 경제적 성과를 통해 충분히 상쇄 가능할 것이다. 이번 사태가 민주주의와 번영의 ‘좁은 통로’를 지켜낸 또 다른 모범 사례로 외부의 관찰자들에 의해 기록되기를 기원한다.

이선화

국회미래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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