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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참여와혁신] 자본주의도 고쳐 쓸 수 있다

작성일 : 2024-02-14 작성자 : 국회미래연구원

	


[박상훈의 노동 있는 민주주의] 자본주의도 고쳐 쓸 수 있다


글.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


현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라고 하는 생산 체제 위에 서 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는 실현되지도 살아남지도 못했다.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는 있어도 사회주의적 민주주의(socialist democracy)는 존재한 적이 없고, 공산주의적 민주주의는 형용모순 같은 용어가 되어 버렸다.


자본주의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 어떤 생산 체제보다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돈만 있으면 가문과 혈통, 신분적 제약도 뛰어넘을 수 있는 자유를 갖게 해주었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는 계층 간 불평등의 원리에 기초를 둔 것이자, 인간 사회의 공동체적 통합을 위협하는 부정적 효과를 동반했다. 돈의 힘은 자유와 함께 새로운 부자유를 낳았다.


자본주의가 동반하는 불평등한 계층 질서와 갈등 관계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이 문제를 빼고 민주주의의 미래를 말하는 것은 공허하다. 반대로 ‘자본주의 폐지 없는 민주주의 없다’며, 자본주의 철폐에 모든 것을 걸자고 말하는 것은 허망하다. 진보나 좌파에서조차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적 생산 체제에 대한 합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는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영미식 자본주의와 스칸디나비아 자본주의 사이에 차이는 크다. 반노동적 자본주의와 노동을 통합하는 자본주의 사이에는 말할 수 없이 큰 유형의 차이가 있다. 자본주의가 고정된 체제인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 안에도 여러 유형이 있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방법으로 자본주의를 변화시키고 수정해 나가는 것 또한 불가능하지 않다. 그간의 역사를 통해 말한다면, 자본주의를 공산주의로 바꾸는 것보다 자본주의를 민주적 가치에 맞게 수정해 가는 것이 훨씬 더 평등한 경제체제를 가져왔다. 자본주의도 고쳐 쓸 수 있다고 믿어야 민주주의도 잘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은 가장 중요한 생산자 집단이다. 그 수에 있어서나 조직적 잠재력에 있어서 그에 견줄 만한 세력은 없다. 따라서 이들의 역할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이해되느냐에 따라 그 나라 민주주의의 내용과 질은 크게 달라진다.


노동을 축소해야 할 생산 비용으로 간주하고 참여로부터 배제하려 할 때 그것은 단순히 노동만 배제하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를 배제하는 것과 같은 부정적 효과를 낳는다. 사회 구성원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가장 중요한 인간 활동으로서 노동이 존중되지 않는 환경에서, 그 어떤 가치 있는 것들이 자라날 수 있겠는가.


노동을 배제하려는 사람들의 심리가 온전할 수도 없다. 노동자들의 권리 주장을 좌경용공이나 반사회적 행위로 몰아가는 비이성적 노동 억압의 논리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 논리 속에는 노동으로 먹고사는 사람을 멸시하고 천대하면서 못사는 사람을 멀리하는 심리가 잠재되어 있다. 그런 심리가 지배하는 한, 어떤 사회도 구성원들 상호 간의 인정과 신뢰, 믿음과 같은 가치나 덕목을 키워갈 수 없다. 이런 환경에서는 인간 사회가 필요로 하는 윤리적인 토양이 척박해질 수밖에 없다.


가끔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느냐?”며 따져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민주주의가 밥 먹여 줄 수 있어야 한다. 어느 정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경제적 분배 효과가 계층별로 달라질 때, 민주주의는 안정된다. 그 경우 어느 사회집단이든 정치 참여의 욕구가 자신들의 필요로부터 발생하며, 결과적으로 개인과 민주주의 사이의 결합이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유럽의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정당 정치의 이념적・계층적 분화가 작은 미국조차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와 공화당이 집권했을 때 계층별 소득분배가 뚜렷하게 다르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 민주정치연구센터’의 창립자인 래리 바텔스(Larry M. Bartels) 교수의 책 『불평등 민주주의』에 따르면, 1947년에서 2005년 사이에 미국 인구의 20퍼센트를 차지하는 가난한 빈곤 계층의 소득 증가율은, 공화당 집권기에 비해 민주당 집권기에 6배나 더 높았다. 지금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는 정치와 사회 사이의 이런 유의미한 함수관계를 만들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와 삶에 기반을 두지 못하는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없다. 가난한 시민들의 눈으로 볼 때, 정치를 누가 하든 자신들의 삶이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고 한다면, 민주주의는 참여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말이 되지 못할 것이다. 퇴직한 노동자들, 나이든 시민들의 절반이 빈곤에 시달리고 고독사를 자신의 마지막 운명이라고 여기게 된다면 민주주의는 그 가치를 잃고 만다. 젊은 노동자들이 고용과 소득에 대한 불안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고, 출산과 양육을 주저하는 사회에서 민주정치의 기능은 그 근본으로부터 회의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고 가는 주범은 다른 것이 아닌, 노동 배제적이고 하층 배제적인 사회,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노동 없는 정치’가 가난한 보통 사람들을 절망으로 이끌고 있다는 데 있다. 어느 사회든 노동 문제는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공동체적인 문제다. ‘노동 윤리’ 내지 ‘일에 대한 헌신’이 없는 사회가 정신적으로 풍요로워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함께 땀 흘려 일하는 보람을 향유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목적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특별한 피조물”로서 우리 인간에게 부여된 가장 원초적인 소명이 아닐 수 없다.


자본주의가 있는 한 아무 의미가 없다는 무책임한 주장보다 자본주의를 노동 친화적인 방향으로 수정하고 조정해 가는 접근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다. 자본주의 이후의 경제체제가 어떤 모습일 수 있는가 하는 것도, 그런 노력이 충분한 성취에 도달할 때 쯤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 출처 : 참여와혁신

https://www.laborpl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