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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고문은 국회미래연구원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이상직] 우리는 어떤 (불)평등을 원하는가?

작성일 : 2023-03-08 작성자 : 통합 관리자

우리는 어떤 (불)평등을 원하는가? 글. 이상직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2023.3.7



우리는 어떤 (불)평등을 원하는가?


학교에 대한 한국사회의 관심은 각별하다. 교육학적 관점에서 학교는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학교는 노동자를 만드는 곳이다. 사회적 지위를 배분하는 곳이다.

대중을 대상으로 한 근대 제도로서의 학교는 노동시장이 형성되면서 만들어졌다. 학교는 생산성이 떨어지는 (또는 노동 인력으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진) 유소년 인구를 가두어 놓는 장치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시작 단계에서 학교는 감옥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는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노동시장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그 사회가 신분사회가 아니게 되었다는 것을 함의한다. 노동시장이 형성되면서 신분보다는 ‘능력’에 따라 일할 것이 기대되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특정한 자리에 배치하기 위한 절차가 필요해졌다. 학교는 사람들을 배치하는 신호를 보내는 역할을 수행했다. 학교는 계층을 만들어 냈다.  

교육 제도가 층화되는 방식과 노동시장이 층화되는 방식을 연결하는 고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개념화할 수 있다. 하나는 교육 제도가 특정 직업에 필요한 자격을 제공하는 정도다. 특정 수준의 졸업장이 주는 신호의 구체성 수준이다. 신호의 구체성 측면에서 보면 미국은 가장 일반적이고, 독일은 가장 구체적이다. 일본은 중간 수준이다. 미국과 일본의 교육 제도가 노동시장에 보내는 신호에서 핵심 정보는 졸업장 자체보다 졸업한 학교나 성적이다. 다른 하나는 학교-직업 이행 과정을 직접적으로 규율하는 제도적 장치의 유무다. 이 측면에서 보면 일본이 가장 수준이 높다. 여기에서도 미국이 가장 낮다. 독일이 중간 수준이다.

미국은 학교-노동시장의 연계가 느슨하고 독일은 촘촘하다. 일본은 그 사이에 있다. 미국은 다수가 대학에 진학한다. 교육 체제의 층화 수준이 낮다. 교육은 분권화되어 있으나 교육과정은 일반적이다. 고졸자 다수는 불안정한 2차 노동시장에 접속해 20대 중반까지 어려운 시기를 견딘다. 여기서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큰 의미가 없다. 졸업장은 1차 노동시장에서나 의미 있다. 그 결과 노동시장 초기에 이직이 잦다. 훈련은 직장에서 이뤄진다. 독일은 다수가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다. 고졸자는 견습기간 3년을 거친 18세 무렵에 성인 직업으로 진입한다. 일자리는 도제 훈련의 수료 자격에 따라 배분된다. 노동시장은 직종별로 촘촘하게 분화되어 있고, 직종별로 그에 대응하는 교육 훈련과 자격증이 요구된다. 자격증은 동일 직종에서 널리 인정된다.  

일본은 미국에 가까우면서도 독일의 특징이 일부 혼합된 사례로 평가된다. 교육 제도의 층화 수준이 낮고 일반교육 중심이라는 점에서 일본은 미국과 유사하지만, 미국과 달리 학교와 노동시장을 직접 연결하는 ‘학교 추천제’라는 제도적 고리가 있다. 이를 통해 청년이 미국과 같이 자유노동시장에 접속하지 않고 독일과 같이 장기고용 내부노동시장에 접속해왔다고 평가된다. 그렇다고 독일처럼 직종별 훈련 자격에 따라 일자리를 배분하는 것은 아니다. 일자리는 학력과 학업 성적에 따라 배분된다. 직접 연계를 통해 취업하므로 연령 제한이 엄격하고, 평생학습 기회는 닫혀 있다.

한국은 미국과 일본의 특징이 혼합된 사례로, 또는 특정 측면이 극단적인 형태로 발현되는 독자 사례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교육 제도의 층화 수준이 낮다는 점에서 한국은 미국과 유사하다. 동년배의 대다수가 대학까지 마친다는 점에서 한국 교육 제도의 층화 수준은 미국보다 훨씬 낮다. 교육 과정의 표준화 수준은 한국이 미국보다 훨씬 높다. 교육 과정이 중앙집권화되어 있고, 교육 프로그램도 표준화되어 있다. 한편 대규모 공채 제도 등과 같은 일본의 특징이 있기도 하다.

교육 제도와 노동 제도가 연결되는 방식은 한 사회에서 계층화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와 관계있다. 미국의 교육사회학자 Alan C. Kerckhoff는 1996년에 둘의 관계에 대해 네 가지 가설을 제시한 바 있다. 첫째, 커리어가 좀 더 촘촘하게 구조화된 사회에서는 학생들이 비교적 일찍 교육과 직업 전망을 구체화할 것이다. 둘째, 커리어가 좀 더 촘촘하게 구조화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학생들이 자기 처지를 쉽게 수용할 것이다. 셋째, 커리어가 좀 더 긴밀하게 구조화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세대 간 이동이 덜 활발할 것이다. 커리어가 일찍 결정될수록 가족 배경의 영향력이 커지기 때문이다. 넷째, 커리어가 긴밀하게 구조화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내부노동시장의 영향력이 약할 것이다. 기업 간 이동이 더 활발할 것이다.

위 가설을 한국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이 말해 볼 수 있다. 첫째, 한국 사회에서는 학생들이 비교적 늦게 교육과 직업 전망을 구체화·현실화할 것이다. 둘째, 한국 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학생들이 그 처지를 쉽게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셋째, 한국 사회에서는 세대 간 이동이 활발할 것이다. 넷째, 한국 사회에서는 내부노동시장이 뚜렷한 역할을 할 것이다. 기업 간 이동은 활발하지 않을 것이다.

생애 경로가 일찌감치 갈리는 사회는 공식적으로 층화되어 있는 사회다. 각 경로는 나름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각 경로의 사회경제적 격차가 아주 크지 않다면 그 사회는 안정적으로 층화된 사회라고 볼 수 있다. 모두가 같은 꿈을 꾸는 것은 아니고 같은 꿈을 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회는 층화되어 있다. 그러나 각자의 꿈이 나름의 방식으로 구현되고, 나름의 경력으로 인정된다. 이 체제에서 시험은 어떤 직업적 역할에 적합한 능력을 갖춘 사람을 선출하는 ‘자격시험’의 성격이 강하다.  

생애 경로가 나중에야 갈리는 사회는 비공식적으로 층화되 있는 사회다. 모두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졸업자 다수가 대학에 진학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회가 열려 있다. 의지와 능력만 있다면 같은 꿈을 꿀 수 있다. 이것이 역동성을 낳는 맥락이다. 그러나 사실상 그 내에서는 보이지 않는 위계가 작동한다. 학군, 학교, 성적 등으로 짜인 위계 구조가 촘촘하게 작동하고, 이것이 역설적으로 더욱 일관된, 다수가 포함되는 위계 구조를 만들어낸다. 단일한 위계 구조에 놓여 있기 때문에 비교에 따른 압박감을 훨씬 크게 느낀다. 실패감 또한 훨씬 크게 느낀다. 이 단일 위계 구조를 조율하는 것은 다양한 형태의 ‘선발 시험’이다. 선발 시험의 목적은 준비된 지위와 역할 수행에 합당한 일정 수의 사람을 선출하는 것이다.

독일의 교육사회학자 Jutta Allmendinger는 미국과 독일의 차이를 1989년에 이렇게 정리한 바 있다. “미국에서 선택의 범위는 모든 학생에게 열려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선택의 범위는 차등적인 교육의 질로 인해 제약된다. 반면, 독일은 교육연수가 계층화되어 선택의 범위가 제한된다. 그러나 동일 수준에서는 훈련의 질이 같다. 따라서 그 과정과 연계된 미래의 가능성은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

독일과 같은 사회에서는 계층 구조가 눈에 보이지만, 안정적이다. 나름의 위치만 지키면 무난하게 살 수 있다. 미국과 같은 사회에서는 계층 구조가 눈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위계는 더욱 강력하게 일상을 규정한다. 매우 불안정하고 경쟁이 치열하다. 실패자에게는 가혹하다. 이런 의미에서 어느 한쪽이 더 불평등한 사회이고 그렇지 않은 사회라고 말하기 어렵다. 불평등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은 후자 사회의 역동성을, 후자 사회의 빛과 그림자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대중 교육 체제가 엘리트 교육과 분리되어 형성된 유럽 주요 국가들과 달리 한국은 초등교육 체제가 먼저 형성된 후 순차적으로 학교급을 높여가면서 교육이 팽창되었다. 중등교육 팽창에 이은 고등교육 팽창은 형식적으로는 기회의 평등화를 가져왔다. 뜨거운 교육열과 이에 상응하는 기회의 확대로 한국의 교육-노동시장 시스템은 일정 기간까지는 계층화를 완화하는 역할을 했다. 그 속도와 수준은 세계에서 독보적이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기회가 형식적으로나마 보편화되면 계층화를 비공식적으로 심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형식적으로 기회를 확대할 여지가 없는 가운데 일원화된 경쟁의 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대폭 늘어나면서 기회 확대 이전보다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기 때문이다. 그에 따른 결과의 격차도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2000년대에 들어 청년들의 학교-노동시장 이행 시점이 여러 국가들 가운데 유례없는 수준으로 지연되는 현상은 형식적 평등화와 실질적 계층화가 맞물린 결과로 볼 수 있다.

교육-노동시장 연계의 측면에서, 계층화 방식의 측면에서 특정 국가가 모델 사례로 언급되고는 한다. 그러나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 나라도 가 보지 않은 길일지 모른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이상직

이상직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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