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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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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상훈] 누가 정치를 사납게 만드는가
작성자
통합 관리자
작성일
2020-12-23
게시글 내용

누가 정치를 사납게 만드는가

글.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거버넌스그룹장 2020. 12. 23.


누가 정치를 사납게 만드는가



1.


오래전 알렉시 드 토크빌이 주목한 바 있지만, 민주주의의 최대 단점은 (정치가나 시민 할 것 없이) 생각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싶은 열정을 절제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민주주의가 아닌 체제에서라면 외면적인 순응을 보여주고 또 얻는 것만으로도 정치를 이끄는 데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모두가 의견의 자유를 갖는 민주주의에서는 각자의 의견이 형성되는 내면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려는 욕구를 자제하기 어렵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민주주의는 서로가 존중해야 하는 정치 규범을 필요로 한다. 그 핵심은 종교에서 사상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의견에 관한 한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규범이 파괴되면, 민주주의를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더 세상의 의견을 자신 쪽으로 돌리려는 허망한 욕구를 참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가 공존하기 어려운 두 개의 극단으로 분열되어 적대와 증오의 자연 상태로 퇴락할 수 있다.  


2.


다른 누구보다도 이 문제를 중시한 사람은 존 스튜어트 밀이었다. 그는 민주주의가 잘못 운영될 때의 문제를 “개인이 다른 개인에 대해 폭군”이 될 가능성에서 찾았다. 민주주의가 수적 우위에 매달리게 되면, 여론의 우세를 추구하는 정치가 사회는 물론 개인의 내면에 이르기까지 간섭하려는 열정을 갖게 된다. 생각이 다른 정치가나 시민은 관용보다 미움의 대상이 되고, 그것은 합리적 이성보다 일방적 감정이 앞서는 정치를 이끌게 된다. 그로 인해 인간의 자유는 위험에 처하게 되고 사회는 의견의 다양성에서 얻게 될 혜택을 상실하게 되는데, 더 흥미로운 것은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데 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혐오하는 감정의 정치는 독단적 열정을 낳는데, 문제는 자신의 옳음에 대한 과도한 확신이 쉽게 “타성”이 되고 만다는 데 있다. 그래서 어떤 쟁점이 등장할 때마다 그것이 사실에 기초한 것인지 아닌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에 대해 따지지도 않은 채, 나나 내 편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해진다는 뜻이다. 그때쯤 되면 타성은 “열정 없는 타산”을 불러오고 그 결과로 남는 것은 “각질화된 마음” 이상이 될 수 없게 된다. 존 스튜어트 밀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한마디로 이견과 다양성의 가치에 대한 존중이 없는 민주주의는 죽은 독단 이상 다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3.


반대가 허용되지 않는 민주주의는 위험하다. 자신의 옳음만 고집하는 것은 반대와 이견으로부터 배울 기회를 상실하게 만든다. 우리가 이견과 반대의 권리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의견의 옳고 그름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의견을 갖는 일의 중요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이 점을 강조하며, “설령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 모든 시민이 동일한 의견이고 그 한 사람만이 반대 의견을 갖는다고 해도 그 한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할 권리는 없다. 이는 그 한 사람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나머지 시민을 침묵하게 할 권리가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다당제 민주주의를 하고 야당의 반대를 인정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매우 간단한 전제에 따른 것이다. 정치에서의 옳음은 대립하는 두 의견 가운데 어느 한쪽이 아니라 두 의견 사이에 있을 때가 많다. 그렇기에 민주주의에서 정치적으로 중대한 결정은 대체로 서로 대립하는 의견의 조정과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야 최종적으로 도달한 공적 결정은 도덕적 정당성을 인정받고, 반대와 이견의 당사자들로부터도 합당한 순응을 구할 수 있다.  


정치철학에서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체제를 가리켜 ‘전제정’이라 한다. 이 체제의 가장 큰 특징은 옳음을 고집해 자의적인 독단을 강요한다는 데 있다. 민주정도 얼마든지 전제정으로 퇴락할 수 있다. 이런 체제는 정치를 시민의 민주적 대표가 아니라 왕을 선출해 맡기는 것과 같은 양상을 만들어 낸다. 앞서 언급한 토크빌은 이런 전제적 민주정 혹은 민주적 전제정에서는 “인간의 심성 속에 시기하는 감정을 강렬하게 불러일으키는 경향”이 극대화된다고 말한다.  


이런 경향이 지배하면 “선거를 치를 때마다 나라는 혁명에 버금가는 열정이 동원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두려움이나 공포를 동원하는 것 말고 국가를 다스릴 다른 방법은 남지 않게 된다는 것, 실패한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토크빌의 우울한 결론은 여기에 이른다.  


지금 우리 정치의 모습이 이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이견과 다양성 속에서 일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어느 한 편의 독단에 편들기만 가능한 민주주의는 흔쾌하지 않다. 조정과 타협이 허용되지 않는 민주주의에서 자라나는 것은 적대와 증오의 정치일 수밖에 없다. 정치가들이 사나운 표정으로 일하는 민주주의는 좋은 변화를 이끌 수 없다. 정당 대변인의 역할이 지금처럼 상대를 야유하는 일로 전락해도 좋은지 생각해볼 일이다.  


4.


서로를 마주 보고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뒤돌아 자신의 지지자들을 향해 상대를 이르는 “아첨하는 정치”를 민주적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정치만 양극화되는 게 아니라 시민도 사회도 감정적으로 양극화된다. (“문빠”와 “태극기부대”로 속칭되는) 일방적 선호와 배타적 혐오를 동전의 양면처럼 갖는 ‘열정적 소수들(passionate minorities)’이 지배하는 여론의 세계에서 안전하고 평화로운 시민의 삶을 실현하기는 어렵다.  


인간의 정치에서 싸움과 갈등을 없앨 수는 없다. 정치란 인간이 가진 적대와 싸움의 본능을 평화적으로 처리하는 기능을 한다. 정치의 이런 기능 없이 적대적 갈등을 피할 수 있는 사회는 없다. 인간사에서 공적 선택을 둘러싼 갈등은 제거될 수 없다. 모두가 동일한 의견을 갖도록 하거나 모두를 이타적인 존재로 바꿀 수도 없다. 그러므로 자신과 견해가 다른 상대 파당을 최대한 비난하고 욕보이는 것을 정치라고 할 수는 없다.  


반대편의 입장을 규정할 때 거부감을 최소화하는 언어를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최우선의 정치 규범이 되어야 한다. 반대 의견을 가진 상대 정당과 내가 속한 정당이 이해하고 있는 것 사이에 의미 있는 합의 지점이 있는지를 찾으려는 노력이 먼저 있어야 하고, 아무리 합리적인 논의를 해도 차이가 해소되지 않고 그것이 오해나 편견 때문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면, 그때는 조정과 타협에 나서야 한다.  


5.


정치를 조정 불가능한 싸움판으로 만드는 정치가들은 민주주의를 실패로 이끈다. 그들은 정치를 “비창조적 흥분 상태”로 이끄는 사람들이다. 변화와 개혁을 만인이 나눠 쓸 공공재로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옳음만 늘 강변하니 얼굴은 늘 화난 표정이다. 독단의 정치를 고수하다 보니 여와 야는 있으나 여-야 사이는 없다. 야유 조 언어가 습성화되다 보니, 정치는 점점 저열해진다. 그런데도 이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외면당하기보다 지지자로부터 갈채를 받는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아 버렸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 정치가 이런 퇴행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게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변화의 노력은 이런 상황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 없이 늘 하던 대로 새로운 제도나 규정을 도입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정치는 문제의 해결자가 아니라 오히려 문제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게 아닌가 한다.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거버넌스그룹장

사단법인 정치발전소 학교장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고려대학교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