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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상훈] 토머스 홉스의 주권론
작성자
통합 관리자
작성일
2020-03-12
게시글 내용



토머스 홉스의 주권론





글.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parksh0305@nafi.re.kr)



1.


고전이란 오래된 것이 아니라 오래 가는 것을 말한다. 인간사에서 몇 안 되는 확실한 사실 하나를 말한다면, 미래에도 고전은 읽히고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고전은 인간 사회의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주는 지적 원천 가운데 가장 권위 있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2.


플라톤의 『국가』는 신의 변덕과 운명의 장난 그리고 자연의 법칙에 속수무책이던 인간을 자유롭게 만든 고전 중의 고전이다. 인간이 자신의 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원대한 사상은 이 책에서 시작되었다. 좋은 시민이 좋은 정치를 만드는 것일까? 아니다. 반대로 좋은 정치가 좋은 시민을 만든다. 이런 생각 역시 플라톤의 『국가』에서 비롯되었다. 신의 계획과 무관하게, 인간이 ‘자연의 선물인 이성’의 힘으로 고안해 낸 최선의 정체(politeia), 그 최초의 설계도 역시 이 책에서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국정기획이라고 부르는 인간 활동의 원형을 보여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식을 사랑했던 철학자 플라톤이다.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완전한’ 기획보다 ‘비교적 나은’ 기획에 만족하려 했다. 스승이 현존하는 인간질서의 부조리를 혁파해 완전한 신국가를 만들고자 했다면, 제자는 현존하는 모든 것에는 나름대로 합리성이 있다는 생각에서 ‘전면적 변혁’보다 ‘있는 것들의 재조합’을 통해 상황을 개선해 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 『정치(학)』은 ‘혁명 예방서’ 혹은 혁명이 아닌 정치의 방법으로 인간 공동체를 나날이 개선해가는 기예(技藝)를 중시한 고전이라 하겠다. 점진적이고 균형적인 개혁을 추구하거나 부분의 개선을 통해 전체적으로도 유익한 효과가 이끌기를 기대한다면, 틀림없이 당신은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관에 더 매력을 느낄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는 전통적 사고에서 벗어나, (흔히 근대라고 불리는 새 시대를 예감케 하는) 이단아적 정치관을 아무런 윤색이나 꾸밈도 없이 그대로 표현해버렸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마키아벨리를 진지하고 점잖은 느낌의 철학자로 칭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그는 관심의 초점을 '이상 국가'나 '좋은 정치' 같은 고결한 주제가 아니라, 지배와 통치 같은 원초적 인간 행위 쪽으로 옮겨 놓았다. 그의 관심을 끈 것은 철학적으로 정의롭고 윤리적으로 선한 정치론이 아니었다. 어떤 방법으로든 과업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투쟁의 방법과 전략의 선택을 다루는 분야에서 강점이 드러나는 책이 『군주』다. 인간 정치의 본질은 “지배하지 못하면 지배당한다.”는 평범한 진리에 있다며, 민중의 자유를 바란다면 ‘나약함’보다는 ‘맹렬함’, ‘위대함’의 미덕을 추구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런 미덕을 마키아벨리는 (적극적인 의지나 주체적 역량을 뜻하는) ‘비르투(virtù)’라는, 자신의 독창적인 개념을 통해 정당화했다. 악과 싸우기 위해 악을 선용하고, 폭력을 없앨 수 없다면 폭력을 선용하는 것이 정치 윤리의 새로운 지침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그보다 더 충격적이고 더 인상적으로 펼치기는 어렵다.



3.


마키아벨리의 『군주』가 가진 대단함을 단지 ‘지배자/통치자를 위한 정치학’ 정도로 이해한다면 그건 편협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마키아벨리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기존 통치자의 지배나 권력을 지키고 유지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자신이 “미래 권력”이라고 불렀던) 이른바 새로운 변화를 주도하는 강력한 힘의 출현에 맞춰져 있었다. 그것은 국가였다. 플라톤이 말한 국가(politeia)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국가(polis)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근대적 국가(stato)였다.


마키아벨리는 국가를 독점적 명령권을 가진 실체적 힘으로 이해했다. 피렌체나 베네치아 같은 ‘도시’가 아니라 이탈리아라고 불리는 ‘국가’를 만들어야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는 발상은 마키아벨리에게서 처음 시작되었다. 그런 점에서 마키아벨리는 곧 도래할 국민국가/영토국가 시대에 맞는 정치학을 개척한 선구자였다. 애국심이라는 ‘근대의 시민 종교’ 문제를 최초로 다룬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단연 마키아벨리였다.


그런 마키아벨리의 『군주』 다음으로 인류사에 남을 정치 고전을 꼽으라면 필자는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들겠다. 마키아벨리와 마찬가지로 홉스 역시 근대 국가론을 정립한 대 사상가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국가론은 어떤 부분에서 서로 연속적이고 또 어떤 부분에서 서로 단절적일까?


역사가의 시각에서 보면 근대 국가의 출현은 『군주』가 집필된 1503년으로부터 100년 정도 더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국가 간 체계(inter-state system)의 등장을 알린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된 해는 1648년이었고, 본격적인 국가의 등장에 발맞춰 주권론을 펼친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출간된 해는 1651년이었다. 동시대 르네상스인들이 모두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으로 돌아가는 것에 만족해하고 있을 때, 마키아벨리는 남들보다 1백 년 앞서 세계는 더 이상 도시가 아니라 영토국가/국민국가로 움직일 것이라는 인식을 가졌다는 뜻인데, 그런 마키아벨리가 없었다면 토머스 홉스의 사상적 혁신이 어떻게 나타났을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4.


미국 예일대학에서 정치사상을 가르치는 스티븐 스미스(Steven B. Smith) 교수는 두 사람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마키아벨리는 신대륙을 발견했고 홉스는 그곳에 사람이 살게 했다.” 국가라는 신대륙은 마키아벨리가 발견했지만, 그런 국가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치사상적 혁신은 홉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스미스 교수는 마키아벨리가 ‘두려움을 갖게 하라’, ‘무장하라’는 원초적 지침을 말한 반면, 홉스는 두려움을 건전하게 활용해 안정된 ‘법과 질서’를 세우고자 했음을 강조한다. 무장한 힘이 아니라 합법적 질서를 통해 개인의 안전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인 바, 이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논변은 홉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고대적 위대함과 함께 영웅적 자질을 겸비한 카리스마적 정치가를 기대한 반면, 홉스는 죽음의 공포를 피하고자 하는 인간 개개인의 차가운 합리성에 기대를 걸었는데, 사실 이는 적지 않은 차이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1503년의 『군주』와 1651년의 『리바이어던』 사이만 해도, 더 구별하고 더 따져볼 만한 사상사적 격차가 적지 않게 존재하지만, 흥미롭게도 홉스가 사상적 경쟁자로 삼은 것은 마키아벨리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달리말해 홉스는 자신이 주목한 미래 국가의 설계를 위해 마키아벨리와 씨름한 것이 아니라 거의 2천 년 전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불러낸 것이다.


홉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반박하면서 주창한 것은, 국가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공적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구인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목적을 갖고 있다고 본, 목적론의 철학자다. 인간 역시 목적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존재이며,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by nature) 형성된 것이 도시국가다. 따라서 시민으로서 좋은 삶을 살고자 한다면 도시국가의 정치에 참여해야 하고 좋은 정치를 구현해야 한다. 이런 정치적 윤리론을 학문으로 체계화한 사람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런데 홉스는 바로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론을 붕괴시키고 싶어 했다.


홉스에게 국가는 자연적인 것이 아닐 뿐더러 자연적이어서도 안 된다. 국가는 목적 있는 삶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윤리적 전제도 아니다. 그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안전을 지키는 데 필요한 인위적 도구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홉스는 자신의 책에서 국가의 기능과 구조를 설명할 때면 인공 기계의 조립도처럼 묘사하곤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것은 비유일 뿐 홉스에게 국가는 기계가 아니다. 국가라는 거대한 인공물의 신체는 인간의 모습을 갖고 있으며, 그 신체를 구성하는 것도 개개인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홉스의 요청에 따라 그려진 『리바이어던』 책 표지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인간 공동체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통치자가 압도적인 위세로 표현되어 있는데, 그의 몸을 자세히 보면 수많은 개인들로 채워진 합성물이다. 이런 국가를 가리켜 홉스는 ‘인공 인간(artificial man)’이라고 불렀다. 국가라는 인공 인간? 대체 이것이 의미하는 바의 핵심은 무엇일까?



5.


홉스의 인간관이 마키아벨리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두 사람 모두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현실주의적 인간관을 가감 없이 표현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부모의 죽음은 잊고 살아도 내 돈을 떼먹고 도망간 사람은 절대 잊지 못하는 존재라거나, 외롭고 궁핍하고 더럽고 냄새나고 게다가 짧기까지 한 게 인간의 삶이라는, 두 사람의 진술은 너무 많이 인용되다보니 이제는 출처 없이 누구나 언급하는 격언이 되었을 정도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는 다른 점도 분명히 있다.


마키아벨리는 위와 같은 인간관에 기초를 두고 ‘바로 그렇기에 지배-피지배 관계에서 강력한 통치 질서를 세워야 한다.’고 보았던 데 반해, 홉스는 같은 인간관을 가지고 ‘그래서 인간은 평등하다’는 논리를 발전시켰다. 홉스의 평등론이 좀 특별하긴 하다. 그것은 유약한 피통치자도 밤에 몰래 무기를 들고 가서 잠자는 통치자를 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공포의 균형’으로서의 평등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평등의 문제를 누가 죽고 누가 죽일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의 문제로 이해하면서 개개인이 취할 수 있는 합리적 선택을 추적하는 것, 홉스의 평등론이 가진 특별함은 여기에 있다. 그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우리가 잘 아는 홉스의 사회계약론이다. 요컨대, 자신의 안전과 자유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달리 말해 서로 죽고 죽이는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법적 요청이자 권리라면, 개개인의 합리적 선택은 모두가 따라야 할 공적 권력을 만드는 신의계약(covenant)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유사한 인간관을 가지고 마키아벨리는 '무장하라', '지배하라'는 교리를 설파한 반면, 홉스의 경우는 '합의하라', '사회계약을 체결해 평화와 안전을 획득하라'는 주장을 발전시켰다는 점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론과도 다른 길을 여는 주장이었는데, 이 지점에 바로 홉스의 정치학에서 가장 독창적인 주제인 주권(sovereignty)의 이론이 위치해 있다.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홉스의 비판을 불러오자. 앞서 살펴본 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란, 자연적이고 윤리적인 질서를 세우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것이 곧 정의를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런 질서에 반하는 통치자를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홉스가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정치학의 처방은 '폭군방벌(暴君放伐)'이다. 좋은 국가, 좋은 통치자여야 한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의 윤리적 전제이고, 따라서 정의롭지 못한 폭군을 방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홉스는 바로 이 점을 비판한다.


개개인이 참여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통치자를 세웠다고 하자. 그래서 그가 통치권, 즉 주권을 갖게 되었다고 하자. 임기 중에 그를 쫓아낼 수 있을까? 아니 쫓아내도 좋을까? 홉스가 보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이를 정당하다고 본다. 통치자가 아무리 합법적으로 옹립되었다 해도 그가 좋은 정치를 이끌지 못하면 강제로라도 쫓아내는 것을 옹호하는 정치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홉스는 그런 선택이 윤리적이고 정의로운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통치자에게 위임한 주권을 중도 해지하는 것, 이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만들어낸 주권의 취지와 충돌한다. 사회적 합의를 파기할 수 있는 지극히 위험한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시민들 사이에 극단적 대립을 낳을 수 있고 적대적 사회 갈등과 공동체의 분열로 이어질 수 있으며, 그 때문에 결국 개개인의 평화와 안전이 다시 위협받는 사회계약 이전의 상황으로 퇴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권을 세운 이유나 목적 자체가 소멸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홉스의 가상적 논쟁을 좀 더 현대적인 언어로 표현해보자. 목적 있는 삶, 좋은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것을 위해 좋은 정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실제로는 통치자가 나쁜 정치를 주도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변화를 원하는 시민도 늘어나게 된다. 오늘날과 같은 민주정치의 조건에서라면 다음 선거에서 통치자를 교체하는 것이 합당한 일일 것이다. 여기까지는 두 사람 모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임기를 마치기 이전에 선거가 아닌 법을 통해 통치자에게 위임한 주권을 중도 해지하려 할 때 발생한다. 몇 년 전 우리가 경험한 대통령 탄핵과 파면이 바로 그에 해당하는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홉스였다면 그 때에도 탄핵에 반대했을 것이다.



6.


홉스가 볼 때 인간은 공권력의 제약을 받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의 자유와 생명, 재산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다. 공권력이 없는 자연적인 인간 사회에서라면 개개인은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남보다 더 큰 힘을 갖고자 하는 욕구를 억제하지 못한다. 홉스는 이를 국가 이전, 즉 사회계약을 체결하기 이전 인간 사회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여겼다. 그는 이 상황을 자연 상태(state of nature)라고 불렀는데, 자연 상태의 상태(state)가 인공적으로 만든 국가(state)와 같은 단어로 표현되는 게 흥미롭다.


아무튼 인공 국가가 없는 자연 상태에서 개개인의 선택은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더 큰 권력을 추구하는 것인바, 이런 개개인의 선택이 가져오는 집합적 결과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일상화다. 자연적 평등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힘에서 밀리면 죽는다."는 공포뿐이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사회계약을 하게 될 텐데, 이때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연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게 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주권은 절대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달리 말해 주권이 쉽게 해지된다면 자연 상태로의 퇴락을 막을 길은 없다는 것이다.


홉스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주권의 해지나 붕괴 상황이다. 국가가 주권을 상실하면 어떻게 될까? 무국가 식민 상태가 된다. 정부가 주권을 상실하면? 무정부 상황이 된다. 주권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 이상으로 쪼개지면? 내전이다. 1860년대의 미국이나 오늘날의 시리아처럼 주권을 주장하는 정부가 하나 이상이 되면 시민 사이의 전쟁, 즉 내전(civil war)은 불가피하다. 주권의 양도는 안 될까? 그것도 어렵다. 입법이나 집행 기능처럼 제한된 기능이나 역할을 양도할 수는 있다. 하지만 주권은 안 된다. 식민지가 입법이나 행정 기능을 본국 정부로부터 양도받는다 해도 독립된 주권 국가가 되지 않는다. 대통령이 여러 명일 수도 없고, 집권당의 역할을 민간에 양도할 수도 없다.


주권은 반드시 존재해야 하고, 존재하는 동안 모두로부터 존중되어야 한다. 주권이 약화되면 공동체의 분열만이 아니라 개인의 기본권도 안전하게 보호받기 어렵다. 주권적 통치 질서가 안정되어야 종교의 자유도 보장될 수 있다. 제아무리 천상의 정부나 초월적 국가론을 갖고 있는 종교단체가 있다 하더라도 세속의 국가/정부의 공적 명령을 준수하지 않으면 국가의 안위는 물론 영혼의 평화도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주권은 곧 국가 전체, 시민 전체의 문제이며 시민 개개인으로 흩어질 수 없다.


시민 개개인이 갖는 것은 기본권이지 주권이 아니다. 주권은 오로지 시민 총회에서만 발생하는 데 지금 우리는 4년에 한 번 총선을 통해 입법부를 뽑고, 5년에 한 번 대통령 선거를 통해 최고 통치자의 주권적 기초를 확립한다. 이러한 절차가 편의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하면 정치체제는 붕괴될 수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홉스의 경고다. 주권이 이렇게나 절대적인 것으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당시 홉스는 무신론자라는 혐의로 종교재판에 불려나가면서까지 고수하려 했다.



7.


다시 한번 가상적 상황을 들어 긴 논의의 결론을 내려 보자. 만약 대통령 탄핵이 한 번 더 시도되는 상황이 되면 어떻게 될까?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대처럼, 나쁜 권력은 몰락하고 좋은 정치의 전망을 갖게 될까? 시민의 삶 속에서 연대와 협력을 도모할 수 있는 윤리적 기초는 더 튼튼해질까? 아니면 마키아벨리의 지침대로 이전 정권을 이끈 세력들을 반발할 엄두조차 낼 수 없도록 철저하게 제거하고 척결하는 것을 통해 더 이상 탄핵의 '탄' 자로 나오지 않게 하면 안전해질까? 이것도 아니라면 플라톤의 바람대로, 대통령탄핵을 총체적 변혁과 국가대개조를 위한 계기로 삼고 미리부터 새로운 국정기획을 준비해야 할까? 그래서 모든 갈등이 사라진 이상 국가를 만들 수 있을까? 대통령 탄핵을 긍정하는 이상의 접근은 민주 정치의 발전을 가져오게 될까? 혹 우리사회를 더 큰 갈등과 분열로 이끌지는 않을까?


홉스라면 어땠을까? 대통령 탄핵이 한 번 더 이루어지고, 그렇듯 쉽게 주권의 해지가 가능해지면 정치는 싸우고, 시민은 대립하고, 공동체는 해체로 치닫고, 기본권은 침해되는 악순환이 될 거라 보지 않았을까? 전직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을 사이에 두고 원한과 복수의 정치가 심화된다는 경고를 하지 않았을까?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통령 탄핵을 반복해 온 남미 대통령제 국가들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으라고 조언하지 않았을까? 제아무리 민주주의라 해도 할 수 있는 게 있고 할 수 없는 게 있다며, 과도한 기대를 절제하고 다음 선거 때까지 기다려 정상적인 정치의 방법으로 정권 교체를 추구하라 하지 않았을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문재인 대통령도 임기 중에 탄핵이 된다면 과연 한국 민주주의는 버텨낼 수 있을까? 한 번 해 본 탄핵 한 번 더는 왜 못하겠느냐며, 이번에도 화끈하게 폭군방벌에 나서자고 할 것인가? 아니면 주권의 원리를 존중하면서 다음 번 시민총회가 열릴 2022년의 대선까지 서로 지혜롭게 준비하고 노력하자고 것인가?


홉스라면 이런 결론으로 마무리 하지 않았을까 한다. “당신은 혐오스럽게 여기는 대통령의 운명을 당신 손으로 끝장내고 싶으신 게로군요. 그렇게 할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알아두셔야 할 것은 그와 동시에 국가 공동체는 분열과 죽음의 공포에 직면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권은 대통령 개인의 존폐 문제도 당신 개인의 원망을 해소하는 문제도 아닙디다. 주권은 전체 정치체제의 운명과 맞닿아 있는 문제이고, 미래 한국사회가 평화롭게 민주주의를 운영할 수 있을지 아니면 적대와 증오, 원한과 복수의식이 지배하는 공포정치를 반복할지를 분기시키는 문제입니다. 주권의 원리에 맞게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정치적 타협과 협상을 통해 통치자 스스로 물러나는 경우를 제외하고, 주권의 중도 해지가 법률적 처벌의 형태도 한 번 더 있게 되면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는 매우 어두울 거라고, 나는 판단합니다. 주권의 문제를 부디 신중하게 이해하고 냉정하게 다룰 수 있는 정치적 이성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