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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고문은 국회미래연구원과 견해가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제목
[정익재] 지나간 미래의 안전과 다가올 과거의 위험
소속
통합 관리자
작성일
2020-08-27
게시글 내용



지나간 미래의 안전과 다가올 과거의 위험





서울과학기술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뉴욕주립대학교 행정대학원 명예교수

뉴욕주립대학교 행정학 박사




인류는 많은 변곡점을 지나왔다. 그 가운데 중요한 모퉁이에는 이정표를 남겨 이전의 삶과 구분하고, 까마득한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과거와 미래 그리고 연속과 변화의 의미를 전달한다. 미래와 변화의 시작은 대부분 범상치 않은 인물 또는 전례 없는 테크놀로지의 출현과 함께했다. 단군왕검도 그러했고, 그보다 2,333년 미래인인 예수의 탄생은 지구인의 시간 항해를 인도하는 기준나침반을 가져다주었다. 기원전(BC: Before Christ)의 삶은 어떠했었고, 그 이후의 미래 생활은 얼마나 변했을까? 아득히 멀고 긴 시간이기에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컴퓨터에서 비롯된 또 다른 기원전(BC: Before Computer)에 대한 기억은 다행히 살아있다. 올해로 30주년을 맞는 개인용 컴퓨터(PC)와 20주년인 월드 와이드 웹(www)의 탄생을 기준으로 ‘before & after’ 변화를 지루하게 나열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2020년 우리는 전혀 예기치 않은 낯선 길목으로 들어서고 있다. 급변의 컴퓨터 시대도 또 다른 기원전(BC: Before Corona virus)과 함께 역사의 뒷방으로 물러나는 게 아닐까


돌이켜 보면, 기원년은 위대한 인물과 함께 생활한 동시대인 또는 신기술 출현 당시 사회구성원들의 전지적 합의에 따라 낙점되지는 않았다. 모퉁이를 돌아섰던 그 순간이 과거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의도된 결과가 아니라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한 점 한 점 연장했던 평범한 현재에 불과했었다. 결국, 역사의 변곡점은 나중에 평가되고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지금 기세등등한 코로나바이러스를 기준으로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는 게 왠지 어색하다. 시대를 나눌 만큼 미래가 충분히 쌓이지 않은 현재진행형이므로 두고 볼 일이다. 조류독감이나 메르스처럼 하나의 전염병으로 지나갈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도 불세출의 인물도 아니고 전대미문의 기술도 아닌 바이러스에서 비롯된 현재의 우려와 미래의 불안감은 어느 때보다도 높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던진 화두는 안전이다. 오죽 절실했으면 여행금지와 자가격리를 군말 없이 따르겠는가? 피하거나 외면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더구나 바이러스에는 백신, 교량붕괴는 첨단시공법, 교통사고는 인공지능 자율주행과 같은 기술 차원의 해법으로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위험은 어떻게 대응하고 관리해야 할까? 각양각색의 사건·사고에 모두 적용할 수 있는 만능처방은 애당초 과욕이다. 피해가 발생할 때마다 국가에 의지하기에는 정부도 과부하 상태다. 미리 예방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대부분 천재 또는 인재라는 이분법의 비좁은 논리 속에서 원인을 찾고, 결국 위험불감증 내지는 안전의식 결여라는 진단으로 마무리된다. 도대체 인재는 무엇이고 우리의 안전의식이 어떠하기에 회한의 넋두리는 반복되는가? 사고 발생 후 새로운 법이 연이어 만들어지고 규제는 빽빽이 들어섰다. 안전 매뉴얼은 곳곳에 널려있고 심기일전의 구호와 다짐은 갈수록 커지건만 유사한 사고는 계속 발생하고, 피해 규모는 줄어들 기미가 없다. 여기서 우리에게 익숙한 예방책과 법규제에 거듭 집착하기보다는 이들을 다듬어내는 위험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과 배경 논리를 다시 짚어본다.


사건·사고는 특별하고 흔치 않은 상황인가? 그렇다. 위험이 일상이 될 수 없고, 바라지도 않는다. 코로나바이러스 못지않게 복권당첨도 드문 사건인데, 전자는 위험이고 후자는 행운이다. 결과에 따라 인식과 평가가 달라지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마음 단단히 먹고 추구한들 당첨을 확신할 수 없고, 아무리 피하려 노력해도 위험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불확실성은 공통된 특성이다. 우리의 일상은 미리 정해진 것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분명치 않은 대상들로 가득하다. 학수고대하는 아파트 재건축 당첨은 물론이고 성가신 자동차 접촉사고도 흔치는 않지만, 생활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이다. 그렇다고 사건·사고를 당연시하거나 무기력하게 받아들이자는 의미는 아니다. 차단하기 어려운 대상을 막으려는 기대와 노력이 자연스럽지 않다. 발본색원, 유비무환, 미연방지와 같은 안전에 대한 과잉된 기대는 정치적 수사로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제로 리스크’(zero risk)를 추구하는 것은 현실과 거리가 멀다. 달성하지 못할 목표에 집착해서 자원을 과도하게 투입하거나 안전 기대치를 턱없이 높임으로써 발생하는 사회적 낭비, 실망 그리고 갈등이 오히려 새로운 위험으로 돌아올 수 있다.


‘제로 리스크=안전’이라는 시각은 평면적이고 단순하다. 위험이 유발하는 손실과 안전이 가져다주는 편익이 공존하는 현실에서 양자 간의 혼합 구성을 개인 또는 사회 차원의 이익이 극대화되도록 선택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지 않을까? 합리적 선택을 위해서는 사건·사고의 발생원인과 책임소재를 조목조목 챙겨야 한다. 그렇지 않고 정부의 설명에 관성적으로 의지하거나 불가항력의 불운을 탓하다 보면, 우리의 위험편익 비교 본능이 퇴화되고 취사선택의 감각이 무뎌질 수 있다. 더구나 온라인 환경에서 믿을 만한 위험안전 정보를 선별할 수 있는 안목과 지혜가 정보 홍수에 의해 매몰되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싸면서 안전하고 편한 것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위험한 것을 비용까지 치르면서 추구할 리 만무하다. 싼 만큼 안전은 상쇄되고, 안전이 증가할수록 비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위험에 따른 고통과 아픔을 대상으로 손익대차대조표를 작성하는 것이 야박할 수 있다. 하지만 위험을 초래한 과실은 당사자가 책임지고, 사회적 가치인 안전을 위해서는 비용을 내는 합리적 행위가 기본이어야 한다. 남이 차린 밥상에 수저 하나 더 놓는 ‘안전 무임승차’가 위험불감증의 핵심이다.


위험은 극복해야 할 실체적 대상인가? 코로나바이러스를 포함해서 대부분 위험은 공공의 적이고, 대동단결해서 맞서 퇴치해야 할 그 무엇이다. ‘유사 이래 처음’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겪었던 사건·사고는 당시 절박했고 피해 규모도 상당했었다. 돌이켜 보면 재난의 신기록은 거침없이 경신되었다. 반대로 피해 결과가 예상보다 낮았거나 아예 걱정 수준에서 마감된 경우도 있었다. 미국산 소와 스치기만 해도 걸릴 것 같았던 광우병은 다행히 심각한 피해 없이 지나갔다. 이처럼 같은 위험일지라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리 인식된다. ‘생활 속의 오랜 벗’이었던 담배가 만병의 근원이 된 지 오래다. 한국인의 대표 메뉴인 돌솥비빔밥이 외국인에게는 화상으로 인한 피해 때문에 조심스럽다. 우리에게 일상이 그들에게는 비상으로, 과거의 기호품이 미래의 기피 대상으로 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동일한 대상일지라도 사람들의 인식에 따른 주관적 위험과 발생확률에 근거한 객관적 위험이 상이할 수 있다. 이는 사회구성원들이 활용 가능한 정보의 양이나 지식수준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대중매체도 예외 없이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언행에 스며있는 문화와 관습도 위험인지의 괴리를 더욱 넓힌다. 우리 손에는 세균이 유난히 많다. 손맛을 중시하는 시어머니가 일회용 비닐장갑을 사용하는 며느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상황에서 위생안전의 경계선은 애매해진다. 문지방을 밟거나 일몰 후 손발톱 깎기를 금했던 조상의 지혜 앞에서는 객관적 위험이 설 자리가 없다. 결국, 위험은 실체적 대상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인식과 시각에 의해서 주관적으로 평가되고, 사회공동체가 공유하는 문화와 전통에 영향을 받아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 우리 조상만 유별난 게 아니다.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서울의 한 동네에서 고질적인 폐기물 무단투기를 막기 위해 내건 ‘쓰레기 버리면 자손 대까지 불운’하다는 현수막이 확실하게 제 몫을 했다. 폐기물 무단투기가 ‘가족 불운’이라는 문화적 맥락과 연계된 무형의 위험으로 작동하여 사람들의 행동을 변화시켰다.


위험의 다양성과 다원성을 고려한다면, 획일화된 안전기준을 설정하기 쉽지 않다. 어린이 보호구역 속도제한 시속 20km, 일반인의 연간 방사선허용량 1mSv, 학교 주변 청소년 유해업종 제한구역 200m와 같은 기준은 위험과 안전의 절대적인 경계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얼마나 안전해야 충분히 안전할까? 안전하면 할수록 좋다는 덕담 수준의 접근은 애매할 뿐 아니라 무책임하다. 위험과 안전의 혼합 ‘황금 비율’은 특정 위험이 가져올 피해를 줄이기 위한 사회적 합의와 공감에서 찾아야 한다. 여기에 정책결정자의 전문성과 더불어 일반인의 수용성은 당연히 반영되어야 한다. 감정과 공포에 따라 내몰리거나 주변 등쌀에 못 이겨 마저 못해 따르는 강요된 공감이 아닌 자신의 판단과 선택에 충실한 수용성이어야 한다.


위험은 손실과 피해를 반드시 가져오는가? 예방하든 대응하든 규모의 차이만 있을 뿐 위험은 손실과 함께한다. 사전에 방지했을지라도 그 과정에 자원과 비용이 투입된다. 그래서 위험을 진작 외면하거나 미리 피하려 한다. 하지만 면피 전략은 우리에게 왜소한 현재와 소심한 미래를 남길 뿐이다. 아니면 요행의 기대심리만 높인다. 다행히 위험은 경험을 선사한다. 비록 비싸고 아픈 경험일지라도 비슷한 상황을 다시 접했을 때 재활용하면 이전보다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기회 편익(opportunity benefit)을 즐길 수 있다. 그래서 무위험(no risk)이 가장 위험할 수 있다. 위험이 가져다주는 학습 동기와 기회 편익을 애초에 차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습도 당연히 공짜가 아니다. 자원분배와 법제도 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생활 방식의 변화를 요구한다. 우렁찬 결의대회나 비장한 삭발행사가 학습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분명 아니다. 학습은 아픈 경험에 대한 복기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이를 희생자에게 결례라고 여기는 문화에서는 기회 편익을 찾기 어렵다. 망각을 권하는 사회 분위기와 조직 문화에서 학습은 불가능하다. 작년에 지방재정을 담당했던 공무원이 올해는 수해현장의 재난안전 책임자로 이동하는 조직 관행에서 기억과 경험이 살아남기 어렵다.


학습에 의한 위험관리는 사건·사고의 발생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희생과 고통은 불가피하다. 심각하고 회복 불가능한 결과를 가져오는 위험마저 학습을 빌미로 기다릴 수 없기에 사전조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희생과 고통은 누구의 몫인지에 대한 답이 쉽지 않으므로 예방책을 선호한다. 위험은 미래와 맞닿아 있고, 미래의 본질은 불확실성이므로 사전예방이 작동할 여지가 생각만큼 넓지 않다. 위험이 발생 가능한 모든 경로를 대비하는 데 엄청난 자원이 필요하고, 전혀 예상치 않은 과정을 통해 발생하면 치명적이다. 기술공학적 안전성이 충분히 갖춰진 후쿠시마 원전의 사고원인과 과정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안전을 직접 찾지 않고 위험으로 굳이 에둘러 가는 이유는 평범하고 친근한 안전은 무심히 지나치지만, 그렇지 않은 위험은 그냥 넘기지 않기 때문이다. 위험 덕분에 안전이 더욱 소중하다. 사람들은 긍정적이고 이로운 것보다는 부정적이고 피해를 가져오는 대상에 훨씬 절박한 관심을 보이고, 해결하려는 동기 또한 더욱 강력해진다. 위험과 안전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우리 생활에 동질이형의 필수 항목이다. 미래의 안전은 과거의 위험에서 잉태된다. 안전으로 가는 비밀은 위험에서 찾아야 한다. 반면에 미래의 위험은 과거의 안전에 안주하면서 성장한다.





참고문헌


정익재. 2019. 사회구성주의 시각을 통한 위험인지의 사회심리적 특성과 대중매체의 영향분석. 정책분석평가학회보, 29(3): 1-20.

Chung, Ik Jae. 2018. Dynamics of media hype: Interactivity of the media and the public, in Vasterman, Peter. From media hype to twitter storm. Amsterdam University Press.

Douglas, Mary & Aaron Wildavsky. 1982. Risk and cultur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Petroski, Henry. 1994. To engineer is human: the role of failure in successful design. St. Martin.

Wildavsky, Aaron. 1988. Searching for safety. Transaction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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