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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ribution of researchers at NAFI

Title
[이채정] 돌봄의 균형을 향하여
Writer
통합 관리자
Date
2020-09-17
게시글 내용



돌봄의 균형을 향하여









글. 이채정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chaelee@nafi.re.kr)



영국 작가 올더스 헉슬리(Aldous L. Huxley)의 소설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속 아이들은 인공수정으로 태어나 유리병 속에서 길러진다. 이 아이들은 부모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공동탁아소에서 일률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라난다. 반나절 학교 수업을 마치면 어머니와 어린 동생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오고, 아버지가 퇴근해 오면 온 가족이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유년기를 보낸 내게 헉슬리의 소설 속 가족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헉슬리가 그려낸 디스토피아의 모습은 아니지만, 헉슬리의 상상이 영 틀린 것은 아니다. 요즘 대부분 가정은 영유아 자녀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낸다. 연로하여 일상생활 수행이 어려운 부모를 직접 돌볼 수 없는 경우가 많아, 집으로 방문하는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거나 데이케어센터를 이용하기도 하고, 노인요양시설에 모시기도 한다. 각자 바삐 살다 보니 한집에 살더라도 온 가족이 모인 식사는 드물고, 공부나 일을 이유로 따로 나와 원가족과 같은 도시에 사는 1인 가구도 많다. 가정 내에서 해결될 것이라고 전제되었던 돌봄(care work)이 가정 밖에서 충족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정책에는 탈가족화(defamilialization)라는 개념이 있다. 탈가족화는 개인이 가족 내 관계나 역할과 무관하게 사회적으로 적절한 수준의 생활을 유지하는 정도로 정의된다. 탈가족화는 탈상품화(decommodification)라는 개념과 함께 논의되는데, 탈상품화는 노동시장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권리로써 필요한 급여 및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정도를 의미한다. 탈상품화와 탈가족화는 노동시장에 참여하지 않고도, 경제적 자원과 돌봄을 공유하는 가족이 없어도, 적절한 수준의 생활을 유지하는 정도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국가가 제공하는 각종 급여 및 서비스가 개인의 시장과 가족에 대한 의존을 어느 정도 대체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데 적용되는 개념이 탈상품화와 탈가족화인 것이다.

복지체계가 정립·확대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탈상품화와 탈가족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자녀양육과 부모봉양은 가족이 책임져야 한다는 전통이 강했던 우리나라에서 전(全) 소득계층 대상 보육료·유아학비 지원과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도입은 긴 세월 가족이 지고 있었던 돌봄의 책임을 탈가족화하는 돌봄혁명의 초석이라 할만하다. 우리는 자녀양육과 부모봉양을 가족이 아닌 국가가 제공하는 사회서비스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를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 19는 돌봄의 탈가족화를 무력화시켰다. 요양병원, 노인장기요양시설 등을 중심으로 집단감염이 발생함에 따라 노인들이 거주하는 공동생활시설에 대한 가족의 출입이 통제되고, 재가서비스와 주야간보호센터도 돌봄서비스 제공을 중단하였다. 아이들의 집단감염을 막기 위해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휴원하고, 학교 문을 닫고 비대면 수업이 진행되었다. 대다수의 국민이 돌봄공백(care decifit)에 노출된 것이다.

정부는 2020년부터 고용보험 가입자를 대상으로 1년 10일의 유급 가족돌봄휴가제도(일 단위 사용)를 신설하였다. 코로나 19의 갑작스런 확산을 생각하면, 신의 한 수였다. 가족돌봄휴가제도는 휴가일수를 기존의 가족돌봄휴직제도에서 차감한다. 가족돌봄휴직제도는 가족(부모, 자녀, 배우자, 배우자의 부모)이 질병, 사고, 노령으로 인해 돌봄이 필요한 경우 사용할 수 있는 90일의 무급 휴직 제도로, 최소 30일 이상 신청이 가능하다. 가족돌봄휴가제도는 경직적으로 운영되었던 가족돌봄휴직제도를 가족돌봄이 필요할 때에 휴가로 활용할 수 있도록 유연화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코로나 19가 재확산하자,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을 개정(20.09.07 국회 본회의 통과)하여, 전국적인 감염병 확산 등 비상상황 시에 고용정책심의회 심의를 거쳐 가족돌봄휴가를 최대 10일까지(한부모 근로자의 경우 15일) 연장(연간 최대 10일 + 추가 최대 10일)할 수 있게 되었다.

가족돌봄휴가제도의 도입과 기간 연장은 탈가족화 일변도의 사회서비스 확대를 통해 추진해왔던 우리나라의 돌봄정책이 급격한 외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가족화 전략을 통해 보완될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나 탈가족화와 가족화 사이에서 돌봄의 균형을 이루기에는 몇몇 한계점이 눈에 띈다. 이 제도의 대상은 고용보험 가입자로, 법률에 근거한 고용보험 가입 제외사업장 종사자는 정책대상이 아니다. 애초부터 사각지대에 놓이는 국민이 존재하는 것이다. 코로나 19 확산과 같은 특수 상황에서 돌봄공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가족 돌봄을 위한 시간의 확보가 근로자를 대상으로 하는 일‧가정양립지원정책이 아닌 모든 국민의 보편적인 권리로 작동할 수 있도록 정책을 재구조화할 필요가 있다. 또한, 시간이 아닌 일 단위로 사용해야 하므로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활용하는 것이 어렵고, 노동시장 여건(성별임금격차 등)이나 돌봄의 책임이 여성에게 있다는 편견 등 한국적 특수성을 고려하면 주로 여성이 제도를 사용하여 성별 돌봄(책임)의 격차(gendered care)가 고착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멋진 신세계」 속 공동탁아소가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언제든 내가 필요로 할 때 내 곁에서 나를 돌봐줄 것이라고 믿었던 가족으로부터 분리된 생활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국가든 가족이든 필요할 때는 누구든지 나서서 아동이나 노인의 돌봄 수요를 충족해야 한다고 우리 사회가 믿고 있듯이, 고용보험 가입자이든 아니든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당연히 나와 내 가족이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서로를 돌봐줄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코로나 19를 계기로 우리 사회가 제도권에 속한 자와 아닌 자,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가구의 구성원인 자와 아닌 자, (사회적으로) 남성인 자와 여성인 자 사이의 돌봄 균형을 향한 건설적인 이야기를 나누게 되기를 바란다.